[단편소설]
03화 홍옥 - 손수건, 쪽지 (brunch.co.kr)
거기, 약속 장소에는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드문 드문 자리마다 다른 남자들도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앉아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거나 차를 홀짝이거나 전화통화를 나지막이 하고 있었다. 저 남자들도 모두 맞선을 보러 나와서 상대를 기다리는 중인 걸까. 그녀의 맞선 상대는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가 엄마로부터 들은 정보와 받은 한 장의 프로필 사진 속 이미지가 그 남자에 대한 전부였는데, 실제로 그를 마주하자 비로소 자신이 정말로 한 사람을 만나기는 하는구나 하는 실감을 했다.
'너 잘만하면 이제 아무 걱정 안 하고 네 원대로 창작활동만 할 수도 있어. 아빠 돌아가시고 늬들 몫으로 떨어진 거라곤 이 집이랑 녹조근정훈장 받았던 명예 그뿐이야. 이것도 다 아빠가 늬들 위해 길을 잘 닦아놓고 가셔서 이만한 혼처도 알아서 들어와 주고 그러는 거야. 부동산이 제법 되는 집이라는데, 그 댁 어르신이 땅을 사고팔고 하시는 갑더라. 근데 왜 그런 집에는 돈은 있는데 문화가 부족해서 너 시 쓴다 하니 벌써 너무 좋아해. 남자애도 성실하다 그러고. 셋째 아들. 구김 없이 잘 컸대. 위로 넘버 원, 투가 있어서 너는 그냥 얘, 병풍 뒤에 다소곳이 앉아만 있어도 되는 자리더라.'
엄마가 어제저녁 밥상머리에서 읊은 브리핑이었다.
나이 몇 세, 다니는 직장 어디, 연봉, 그리고 그 부친의 직업 같은 것들. 그렇게 엄마의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한 사람일 텐데 그녀의 귀에 들리기로는 한 낫 낱말들의 나열에 불과했기에 암만 해도 나이, 직장, 수입, 집안과 같은 낱말들 사이사이 찍힌 쉼표의 개수를 헤아리는 것 밖에는, 그것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깍듯했다. 의자를 뽑아주려고 했으나 그녀는 스스로 의자를 빼 앉았다. 철저하게 약게 계산적으로 임하기로 했으니 다시 또 안 볼 사람에게서 의자를 빼는 등의 가외의 에너지를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그녀의 지갑에는 여차하면 내고 갈 2인 분의 찻값도 있지 않은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남자에게 혹은 남자의 엄마 혹은 아빠에게 어떤 낱말들로 소개되어 사전심사를 거쳐 엄선되었던 것일지.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쯤은 묻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남자를 또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한 십여 분 정도 무슨 이야기를 그래도 어찌어찌하며 보낸 것 같았다. 둘 사이 놓인 테이블 위에는 정갈한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가 놓고 간 커피잔이 두 개 놓여있었다. 웨이터는 계산서를 자연스럽게 남자 쪽에 놓고 나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선이 그 덮게 덮인 계산서를 향해 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나왔을까. 혹시 삼만 원이 넘지는 않을까. 그때쯤 남자는 여태 자신이 맞선을 본 여자들이 총 몇 명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이 오늘로 해서 몇 번째 인지를 헤아려 볼 겨를 없이 그 이야기에 어떻든 맞장구를 칠 단어를 골라야 했다. 남자는 뒤이어 직장 이야기를 했고 그 밖에도 또 이런저런 정보전달을 하고자 했고 마침내 그녀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래, 아무리 못해도 혹 적금이라도 붓고 있는지, 재무 지식은 어느 정도 있는지, 재테크에 관심 같은 것은 있느냐고.
그녀가 머뭇거렸다.
솔직히 조금 쪽팔렸다. 아는 게 없다. 그 나이 먹도록 대체 뭘 한 걸까. 지금 남자는 졸업 후 사회적 성취 없이 살고 있는 나를 내려보면서 묻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올라왔다. 별 대답을 듣지 못한 남자는 멋쩍게 웃으면서 사실은 적금보다도 장기 저축 펀드 라던지 다른 금융상품들이 더 유용하기도 하다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남자에게는 남자가 받아오는 연봉을 지켜줄 여자가 필요할 테니 그녀는 그 남자를 이해하기로 했다.
대화는 주로 남자가 주도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 반이 흘러 있었다. 한 시간 반. 두 잔의 커피. 한 시간 반이었으니 왠지 커피값도 한 잔에 만 오천 원 해주면 좋겠다 하고 여자는 끝까지 생각했다. 그래도 웬만하면 조금은 더 앉아있어 줄 의사는 있었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커피잔을 다소 큰 모션으로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는 남자 뒤로 커다랗게 난 통창 유리를 통해 여과 없이 비춰 들어오는 볕에 그녀의 미간에는 다시금 주름이 잡혔다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