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04화 홍옥 - 병풍 뒷 자리 (brunch.co.kr)
혹시, 유전병 있으십니까?
동그랗게 눈을 뜨며 여자가 되물었다.
예? 뭐라고요?
남자는 어쩜 정말 구김살 하나 없이 시원시원했다.
아 제 말은, 유전병 같은 거 있으시냐고요.
어.. 아.. 유전병. 혹시, 제 당선작... 읽으셨나 봐요?
간신히 문장을 다듬어낸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다.
아마 저희 어머니께서 언급을 하셨나 봐요.
그거 아무도 잘 모르던데. 당선작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거기 첫 행에 다정이 유전이라 이별은 아프기만 한데,
별들이 대신 가슴도 앓아준다는.. 뭐 이런 말을 썼었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순간 생각했다. '잘했어.'
엄마가 일러준 대로 혹시라도 물어보면 그대로만 말하면 된다고, 00년도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으니 당선작을 말해주는 거라고. 다시 안 만날 사이라도, 자릴 마련해준 성의를 봐서라도 웬만하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해주고 오면 서로 나쁠 것 없으니까. 잘했어, 시 쓴대서 좋아했다잖아? 잘했어, 참 잘했어 그렇게 그녀는 일순간 잠깐 의기양양했다.
적금도 안 들고 무슨 펀드도 모르고 개뿔 시집도 제대로 못 내고 시집이나 가서 팔자 고칠까 하는 등살에 떠밀려있는 처지였어도 그 오래전 당선작을 낭랑히 읊어줄 수 있다면, 그래도 이 맞선이 아주 밑지는 만남은 아니었노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사실 조금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려가면서 상기된 미소 띤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저도 몰랐네요.
전 단지 중간에 아프셔서 좀 오래 쉬셨다 해가지고요.
지병 같은 게 있으신가 했는데 하하하... 이참에 유전병 같은 건지도
알면 뭐 겸사겸사 좋고요.
남자는 멋쩍게 웃느라 윗니를 거의 전부 드러냈다.
남자는 그녀에게 또 물었다. 시를 쓰셨다던데 그럼 시는 한 편에 얼마의 고료를 받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아직 시를 제대로 팔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계산적으로 굴기로 했는데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그녀의 계산에는 전혀 없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답도 하나 변변히 못했다는 소리가 이 귀에서 저 귀를 통해 그녀의 가여운 엄마에게까지 들어가면 엄마는 그녀에게 실망해 버리고 자기 노년에 찾아온 활력을 그대로 사장시켜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아랑곳 않고 남자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학교 때 자신도 시를 읽곤 했는데 그게 김춘수였나 김영랑이었나 하다가 대뜸 외쳤다.
맞다, 생각났어요.
김소월!
순간 그녀는 유리잔에 든 물을 들이켜다가 사레가 들어 얌전하게 크음- 한 번만 한다는 것이 커억- 하고 솟구치는 바람에 스카프며 테이블에까지 물을 튀기고 말았다.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뻗어 냅킨을 건네었고 그녀는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한 채 핸드백 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찾아 쥐고는 입가며 앞섶이며 테이블 위를 열심히 훔쳤다. 그 와중에도 마른기침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