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니스 회원 편
아무래도 신경이 거슬린다.
이 호텔 피트니스 회원으로 다닌지도 벌써 20년 째,
이제껏 저런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를 들인 적이 없었다.
피트니스 회원이 되려면 우선, 몇천만원에서 억에 가까운 회원권을 구입하고
별도의 연회비를 지불해야만 한다. 하지만 돈이 다가 아니다.
호텔이 관여하지 못하는 피트니스 회원들의 모임에서 회원으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투표로 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한 번도 모임의 위상을 실추시킨 적이 없었다.
우리가 굴리는 트레드밀 아래 저 복잡한 로비에 있는 무리와는 격리된 우리만의 공간, 우리만의 세계.
그런데 며칠 전부터 20대 후반의 길쭉한 여자애가 향수를 가득뿌리고 나타나서
레깅스와 탑만 입은 채 우리의 공간을 마구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려 모임에 한 번 빠졌을 때, 그녀는 얌전한 복장으로 이 호텔에서 회원분들께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 이 곳에 들어오고 싶다는 식의 눈물없는 연설을 했다고한다.
이런 아이들은 대부분 F나, C호텔로 다들 가는데 굳이 60대가 가장 어린 여기에 와서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려고 노력하지 못해 안달난 것일까?
회원 몇은 괜시리 직원에게 복장에 대한 주의를 주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호텔에도 피트니스 복장에 대한 규정은 회원 가입서 어디에도 없기에 난처한 얼굴을 한 채
멍청히 서있을 뿐이다.
나는 결국 내가 나서기로 한다.
"아가씨, 저 피트니스 회원 모임원 중에 한명인데 그 때 몸이 안좋아서 못봤네요.
반가워요."
"...."
대답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탓에 화를 꾹 누른 채 그녀의 트레드밀에 손을 올린다.
그제서야 그녀가 에어팟을 빼며 나를 쳐다본다.
질문도 없이, 인사도 없이 '뭐냐'는 표정이다.
"저 피트니스 회원 모임원 중 한명인데, 인사하자구요. 제가 먼저 인사를 청하네요"
"아, 네. 굳이 뭐 인사까지. 그냥 운동하면 되죠."
대답하는 저 싸가지에 참았던 화가 폭발한다.
"여기 사람들 다 있는데, 특히 어른들 있는 곳인데
레깅스에 위에 브라자만 입는 건 쫌 조심해줬으면 좋겠어요."
"네? 하하하하하"
그녀의 웃음에 오히려 당황한 나는 뭔가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저 똑같이 회원권 구입했고, 연회비 냈고, 복장규정은 없는거 확인했고
제 돈 내고 제가 다니는데 왜 운동복까지 여기 계신 어르신들 위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녀의 당차고 또박또박한 발음에 나는 기가 눌려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를 눈빛으로 응원하던 회원들도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세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 샤워실로 향했다.
내가 졌다.
근데 나는 왜 그녀의 레깅스와 탑이 불편했을까?
그녀의 젊음이? 당당함이? 나의 세상에 깨뜨리려는 그 기시감이?
빨리 집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에 이기사에게 '5분' 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데 그녀가 들어왔다.
레깅스와 탑을 벗어 탈수기 옆에 두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몸이였다.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샤워실에는 CCTV는 없다. 사람도 없었다. 청소하는 직원도 없었다.
그녀의 레깅스와 탑을 조용히 집어들었다.
땀으로 축축했지만, 여전히 강한 향수냄새가 났다.
수영복을 담아가는 비닐에 담아 꽁꽁 묶어 샤워실 밖으로 들고 나간다.
로비입구에는 이기사가 차를 대고 대기하고 있다.
나는 손바닥을 보이며, 잠시라고 말한 뒤 로비 화장실로 향해 그 봉투를 버린다.
내가 이겼다.
이겼나?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로비의 레깅스와 탑이 나를 뒤 따라오는 것만 같아 뒤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