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이 기준.
오후 낮잠을 자지 않은 아이가 동생이 깨지 않도록 거실에서 조용히 웅얼웅얼 혼자 놀며 기합인 듯 주문인 듯한 말을 반복하고있다. 뜻도 없는 그 말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어떤 특정한 때마다 튀어나오는, 자기 세계가 생겨가는 아이를 본다. 혼자서도 끊임없이 논다. 알아듣지 못 할 말을 하고 못 알아 들으면 역정을 내기도 일쑤.
어른이 했다면 병원을 권하겠지만 아이이기에 충분히 사랑스러운 언어로 조금씩 차오르는 자아.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도구들로 자기를 말하고 항변하고 즐기는 생동. 그렇게 아이의 몸과 마음 여러 곳이 각자의 시간대로 자라는 여름의 한 가운데.
다 컸구나 여긴 나는 문득 말을 거르지 않고 빠르게 던져 놓고는 아이가 이해했다고 생각했나보다. 요사이 그렇게 아이의 나이를 훌쩍 불리다가 화들짝 놀라 뒤늦게 어루만지기를 여러번했다. 그러면서,'모르겠지'하던 것을 생각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과 '알겠지'했으나 아직 시기상조인 지점들을 발견한다. 기특함과 대실망의 양극을 바쁘게 오간다.
하원버스서 자다 내린 걸 안아서 돌아오는 길에
한 할머니께서 말 만한 놈이 엄마에게 안겨 다닌다고 한 마디하고 지나셨고 할머니가 몇 걸음차로 멀어지기 무섭게 내 귀에 대고 아이가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어떤 얘길 해줘야 하나. 이제 내려가 걷자고 할까,고민 중이었다.)
"엄마, 저 할머니는 내가 졸린 것도 모르나봐."
그러고 고개를 내 어깨에 묻는다.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단단함(당당하기도 담담하기도 한)에 소리내어 하하하 웃어버렸다.
'덥고 무거운데다 너의 머리에서 풍기는 시쿰한 땀냄새에 힘들지만. 그래, 나는 네가 졸린 걸 알고 있으니. 기꺼이 힘들어 줄게.'
의젓해서 기특함을 느낄 땐 행복하지만 빠르게 내려와야 해서 달콤함을 오래 즐기기 힘들다. 대실망의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저 버틴다.
아이는 뻔뻔함으로 아이다울 때 사랑스럽고 그럴 때 나는 가장 적당한 강도로 오래 힘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