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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놈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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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단우 May 07. 2020

곧 얼마 안남았네?

살 만큼 살았다는 그 집 개주인의 말

  디디와 산책을 다니다보면 가끔 나이있는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공원 벤치 주변을 빙 둘러 산책을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러하다. 동네 공원 벤치에는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는 일명 '할망 핫플레이스'가 있다. 아마 경로당이 같이 붙어있는 공원의 경우 어르신들의 핫플레이스가 지정되어 있을 것이다.


  어르신들은 디디를 보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시는데 그 말이 상처가 될 때가 참 많았다.




  "암컷인가? 젖이 쳐졌네."


  "똥개새끼가 무슨 옷을 입어."


  "개냄새 나네. 으휴~"


  "저기요, 개똥 좀 지우고 가쇼."


  "발발이인가? 족보없는 똥개같이 생겼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욱하고 성질이 올라와서 잔뜩 할 말을 퍼부어주고 싶다. 온갖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 올라서 이렇게 따지고 들고 싶다.




  "저기, 어르신. 그렇게 생각하시는 혈통있는 개들이나 순종은 대체적으로 브리더나 합법적인 거래 외에, 아니면 그냥 대대로 집안에서 기르는 것 외에는 잘 없다고 보셔도 무방하구요. 얘는 항문낭을 주기적으로 짜주기 때문에 냄새가 안나구요. 저기 굴러다니는 개똥은 제 개가 눈 것도 아닌데 왜 치워야 하죠? 전 청소부가 아닌데요. 발발이라뇨. 인간은 동성동본 안하면서 무슨 개끼리 순종을 따져요. 사람이나 개나 자기 맘에 드는 상대 만나서 잘 살면 그만 아닌가요?" 




  그렇지만 가장 황당한 사례를 기억하자면, 이런 레벨을 하위 수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책 중에 일부러 어르신들의 지적질을 피하려고 다른 길로 가던 중이었다. 어느 젊잖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이 맞은편에서 다가오셨는데, 대뜸 디디에게 손을 뻗었다. 디디는 당황하면서 으르렁거리며 내 뒤로 숨었다.




  "개가 순하지 못하네, 쯧."


  "할머니, 원래 개들이 낯선 사람이 손을 대면 무서워해요."


  "사람을 보면 꼬리도 흔들고 애교도 부려야지."


  "제 개는 겁이 많아서 안그러기도 하고, 원래 사람도 처음 본 사이끼리는 안그러잖아요."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딱딱한 태도에, 할머니는 시선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개가 몇 살이유?"


  "아, 스무살입니다."


  "살만큼 살았네."


  "네?"


  "그만큼 해쳐먹었으면 됐지 뭘. 사람도 그런데. 쯧쯔..."




  어안이 벙벙한 나를 뒤로 한 채,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지나갔다. 기분이 퍽 나빠진 내가 '저기요!'하면서 등을 돌리자, 할머니는 들은 척 하지 않고 저 멀리서 혼자 날뛰고 있는 개를 향해 '여어, 여어'하고 불러댔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공원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산책 중인 개들을 방해하고 있던 갈색 푸들. 할머니의 개였다. 뒷짐을 진 할머니의 손은 리드줄 따위 잡혀있지 않은 빈 손이었다. 푸들은 난리법석을 떨면서 할머니를 따라 쫄래쫄래 길을 나섰다. 하네스니 인식표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저 할머니에게 '할머니, 그러시면 안되구요.'하는 식의 말을 해봤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싸가지없는 떽떽거림'으로 밖에 안들릴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본인도 반려견을 기르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 디디와 산책을 하다가 배드민턴을 하던 젊은남자에게서 '너 성질 더럽게 생겼다.'하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더 상했다. 아니다. 작년에 산책을 하면서 '난 개새끼 싫어'라고 했던 배불뚝이 중년 남성에게 들었을 때보다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산책을 하면서, 아니면 디디와 함께 어느 곳을 가면서 외부인의 접촉이 두려울 때가 많아진다. 디디가 스무살이라고 하면 놀라워하시거나 예뻐해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이렇게 독한 말로 마음을 후벼파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개를 키우는 사람에게서 듣는 언어들이 마음에 더 시리게 남는다. '개빠'라느니, '개새끼', '극혐'따위의 말보다 같은 반려인에게서 듣는 말이 가장 상처가 된다.



  반려견들과 반려인들이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공연히 오해받지 않는 산책을 다니고 싶다. 안그래도 갈 날이 머지 않았는데 그네들로 하여금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면 좋겠다. '곧 죽겠네'하는 말이 걱정일지언정 '오래 살거라'하는 축복의 언어로 수정된다면, 그 아이의 보호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지 배려받는 산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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