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단우 May 26. 2020

야, 팬티를 물어오면 어떡해!

아이는 보호자의 팬티를 물고 왔다.

  첫 의뢰가 들어왔고 잔뜩 긴장을 한 채, 가방 속에 꾸역꾸역 짐을 담아 버스를 탔다. 잊고 나온 물건은 없는지 다섯 번은 더 체크했던 것 같다. 물병, 손소독제, 물림 방지용 장갑, 털 제거용 찍찍이 등등. 마스크를 쓰고 유니폼 자켓의 지퍼를 올리면서, 벌써부터 긴장감에 땀이 흘렀다.




  "딩동"



  고객님의 자택에 도착했다. 자택은 예전에 다니던 직장과 머지않은 곳에 위치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같은 시 안에서라도, 뚜벅이 펫시터는 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움직여야 했다. 유니폼에 '펫시터 어쩌고'하는 문구가 조금 창피했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갖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래나 저래나 고객님 집 앞에 도착하고 라이브캠을 켰다. 문 안 너머로 멍멍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소독제를 뿌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벌써부터 마스크 안으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고객님이 미리 알려주신 대로 번호키를 누르고 입장했다. 그러자 방 안에서부터 타타타타타 하는 격렬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치와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치와와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 해서는 있는 힘껏 꼬리를 흔들어댔다. 아이는 사회화가 잘 되어 있는 강아지였다. 아이가 마음껏 냄새를 맡도록 인사를 한 뒤, 맘마 그릇과 물그릇을 세척해서 새로 채우고 배변패드를 정리했다. 욕실 바닥에 있던 응가들은 변기에 내리고 샤워기로 바닥청소를 했다. 아이와의 돌봄은 어렵지 않았고 30분이 오버되면서까지 돌봄을 진행했다.



  첫 번째 돌봄을 마치고 나니 긴장감이 사라지고 부쩍 자신감이 늘었다.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그 30분 동안의 짧은 돌봄에 대해서 계속 떠들어댔다. 이제 나는 개 박사다, 나는 어떤 개를 돌보아도 문제없다 등등 근자감에 취한 말들을 쏟았다.



  이후 또 다른 지역에서 펫시팅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집에서 1시간 반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마다하지 않고 수락했다. 내가 사는 지역 이외의 장소에는 생각보다 펫시팅 의뢰가 자주 있지 않았다. 많아야 일주일에 두 건 정도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1시간 반 거리의 장소라도 가야 했다.




  "선생님, ㅇㅇ에서 오신다구요? 거리가 너무 멀지 않으세요? 1시간 넘게 걸릴 텐데요 ㅠㅠ"


  "괜찮습니다! 지하철로 가면 되니까요~ 근방에 도착해서 연락드릴게요 :)"




  고객님은 너무 먼 거리의 펫시터가 온다고 하니, 걱정되는 투로 메시지를 보내셨다. 물론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11km 정도의 거리는 무조건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와서 제발 가달라고 사정사정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회사와 껄끄러운 관계를 맺기 싫으면 괜히 '그 정도 거리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솔선수범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아무튼 고객님의 집에 도착해서 같은 순서대로 펫시팅 준비를 마쳤다. 이제 고객님의 집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아이가 낯선 사람을 향해 달려오는데 입에 뭔가가 물려 있었다. 고객님의 속옷이었다. 그것도 팬티!




  "야, 그걸 물고 오면 어떡해."




  영상이 스트리밍 되는 중이라 차마 민망하게 일일이 다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메라의 위치를 살짝 낮추고 아이의 시선을 다른 곳을 돌린 뒤, 바로 팬티를 빼냈다. 그렇지만 아이는 굴하지 않고 바닥에서 브래지어를 물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아이쿠, 이런! 아이는 팬티나 브래지어 같이 주인의 체취가 강한 속옷들을 가지고 터그 놀이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팬티와 브래지어를 빼내려 씨름을 한 뒤에야 아이와 스킨십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아이는 장난감(속옷)을 뺏어간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하다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나도 그제야 안심을 하고 배변 정리, 실내 돌봄 등을 진행한 후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펫시팅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집을 방문하고 가지각색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별의별 물건을 다 물어오는 걸 본다. 그런데 킹 오브 킹은 역시 팬티 사건이다. 아직까지 팬티를 입에 물고 씨익 웃던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다음 주에는 MAC 립스틱의 입구를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짜식, 비싼 건 잘 알아가지고!



  이번에 만날 아이는 어떤 물건을 물고 나타날까? 장난감? 팬티? 브래지어? 립스틱? 양말? 매 번의 돌봄이 참으로 익사이팅하다.

이전 10화 내 새끼는 나한테만 귀여운 겁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