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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인가 아니면 자존감일까

<3>

by 디딤돌

( 어져 내 일이여 )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다운로드 (3).jpg (황진이 초상화 / 네이버)


“사랑하는 님을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다 말도 못 해보고 그냥 보내고만 자신을 한탄하고 있는 시조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황진이 작이다. 서슬 퍼런 유교사회에서 이런 유(類)의 시조는 양반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겉으로는 체통 없는 천한 것의 시조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작자의 천재성과 미모를 동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훗날 임제(林悌)는 그녀를 기리는 글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이하 중략)을 읊었다가 논란의 장본인이 되었다고 하니 겉과 속이 다른 시대를 산 옛 분들은 이중인격자가 아니었을까? 물론 지금의 후손들도 다분히 그렇긴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문뜩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자존심과 자존감이다. 작자에게 끌리는 이성을 앞에 두고서 호감이 간다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당시 시대상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현재의 시각에서 그녀의 깊은 속마음, 즉 심리 상태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심리현상에 관해 여기저기 뒤져본 자료를 종합해 보면 분명 자존심이 그녀의 고백을 가로막았을 것 같다. 자존심을 보면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록 신분이 천하지만 자신의 재능과 미색을 자부했을 터이므로 솔직한 자기감정을 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자존감은 “그냥 나를 나로서 인정하는 것”으로 명료하게 정의한다. 흔히 자존감을 높이라고 조언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전제 조건이 어느 정도 필요한데 우선 성장배경이 중요하다.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았을 때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배경, 신분, 신체조건 등 다방면에서 무난해야 한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자존감과 친해지기 어렵다.


반대로 작자가 자존감이 높았다면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 우선은 이처럼 멋진 시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상대의 승낙여부에 관계없이 상처를 받지 않거나 복원력이 강하다면 애초에 이런 시조를 읊을 감정 자체가 솟아나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과도한 자아 존중감은 역설적으로 예민한 부분을 포착해 내기 어려울 수 있어 보인다.'


흔히 자존심은 부정적으로 보고 대신 자존감 높이기를 권장하는듯한데 내 생각은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자존심이 너무 약해지면 열등감이 들고 호구 취급을 받는다.’ 동시에 자존감이 낮아지면 “모두 내 탓이오!”를 연발하면서 일명 착해 빠진 사람이 된다. 타인은 좋은 사람 정도로 인식하겠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태도다.


이쯤에서 “적당히”란 말을 잘 음미해 보자. 언뜻 꼼수란 의미로 비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세상일의 대부분은 적당해야 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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