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삶 속에서 그리 강자의 편에 서있었던 적이 드물다. 나의 태초의 시작은 들판의 한 마리 양이었다. 위험이 도사리는 정글에서 항상 조심하여야 했다. 양의 생존의 방식 중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잘 피해야 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호시탐탐 물어뜯으려는 늑대의 무리에서 말이다. 그러기에 울타리를 넘어서는 위험한 행동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른 해를 부쩍 넘긴 시간은 나를 그렇게 무채색에 가깝게 만들었다. 자신의 색이라는 고유함이 없는 존재가 된 나는 속된 말로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하다고 누군가에게 번번이 정의되었다.
무심코 돌부리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주변을 살피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안위를 위한 것인데 어느새 삶의 목적에 주변을 살피고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주가 되었다. 나에 대한 것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후순위로 밀려지게 되었다. 문득 공허한 방 안에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초라하게 빛바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나를 아끼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수많은 거미줄처럼 이어진 관계의 늪에서 불안한 감정만이 남아있다.
나를 위한 마음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 발목을 가장 잡는 것들이 무엇인지 써보았다. 지적질만 하는 밉상 상사의 존재, 항상 허덕이는 통장잔고, 시시 때때로 돈자랑질을 하는 재수 없는 지인, 못난 이별로 미처 정리되지 못한 전 연인 등등이 상단에 적혔다. 쉽지가 않다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에도 한 발을 떼어보아야 한다. 미약하지만 이 발걸음의 파동이 나를 저 멀리 목적지로 인도해 줄 수도 있다.
일단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하였다. 추억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미련을 버리기로 하였다. 그녀에게 받았던 것들을 하나 둘 모아서 봉투에 담았다. 마주 잡고 있던 사진 속에 모습을 보고 순간 멈칫거려졌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끊어진 실은 결국 다시 묶이지 않는다 미련이다. 선물 받았던 것들과 그 시절 시간들을 꾹꾹 눌러 담아 버렸다. 한 방울의 눈물은 쓰디쓴 알코올의 소주 한잔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다음은 깨지지 않기 위해 나의 불쾌함을 감추었던 말을 솔직하게 전했다. 여지없이 부동산 투자만의 살길이고 자신의 삶이 정답이라는 설파하는 친구의 연락에 말이다. 너의 이야기가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에 여유는 이루어지지 않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퇴근 후 유쾌하게 배민을 시켜 먹고 웃을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일순간 당황스러움에 정적이 왔고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작 끊어지면 어떡할까 불안했던 마음이 오히려 평온함으로 찾아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조심스럽게 연락온 친구는 인제 자신의 삶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비어져 버린 헛간을 채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잘 보지도 않으며 무분별하게 결제한 OTT 서비스는 최소한으로 줄였고 점심으로 지출되었던 식비를 도시락으로 절반으로 경비를 낮추었다. 그리고 잘 알아보지 않고 상담원에게 넘어가 매달 우호죽순으로 빠져나가는 보험을 해지하였다. 그렇게 없어도 큰 지장이 없는 낭비를 줄이니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비어진 지갑에 많지 않지만 지폐들이 조금씩 채워졌다.
제일 힘든 미션이고 어렵게 된 모든 직장인들의 고충인 상사와의 고리는 의외로 뜻밖의 계기로 해결되었다. 근간에 직장 내 괴롭힘이 뉴스로 회자되었고 이것이 일의 능률을 해친다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여파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일어났다. 고충센터가 생겼고 전수조사가 일어났고 속앓이를 하고 있던 개미들은 하나 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조리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심스러웠졌고 한번 더 생각을 하고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밉상 상사도 그 나비효과에 변하였다. 물론 아직도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스트레스를 주지만 그래도 줄어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하나 둘 나는 나를 생각하기 위해 집중하지 못한 것들을 정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집중해 본다. 그렇게 알아가다 보면 자존감이라는 것이 낯선 단어가 되지 않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정이 미약하지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