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백에 무언가를 채우려 무뎌진 연필을 잡고 있다. 어릴 적 아이에게는 이 공백이 너무나 즐거운 장난감이었다. 무엇이든 꿈꾸고 그리며 낙서를 할 수 있던 즐거움의 공간. 하지만 시간을 먹고 자라난 이성과 두려움에 더 이상 공백이 놀이터가 아니었다,
나는 무뎌진 연필로 긁쩍 긁쩍 무언가를 써보려 한다. 하나 둘 쓰인 단어와 문장은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지키지 못한 것들 잃어버린 사람과 꿈들. 상처가 난 공백의 자리를 어루만지며 나는 문득 당신을 생각하였다.
나에게 소중한 것 나를 빛나게 하였던 것 내가 끝없이 갈망했던 사랑. 당신은 동그라미 같은 사람이었지. 모나지 않고 나의 삐죽함을 감싸주었지. 그래서 세모 같던 나는 동그라미의 당신을 동경했었다. 떼굴떼굴 굴러 각진 부분들이 마모되고 이제 변해버렸는데. 내 시간 속에는 당신의 자리는 없다.
아련한 상실의 슬픔을 허공에 날려 보낸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대한 집착은 무뎌진 연필의 심을 날카롭게 만든다. 원망과 당신을 미워하는 문장들을 적어본다. 하지만 이내 얼마 가지 못해 지우개로 하나 둘 당신을 지워버린다.
부끄러움을 눈물을 알아버려 더 이상 나는 연필을 붙잡지 못하겠다. 미련과 끝을 향하지 못한 슬픔은 마음 제일 아래 체념이라는 칸에 꾹꾹 눌러 담는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잠가버렸다.
결국 나는 이 공백에 어느 하나 적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