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그림자에 파묻힌 마음의상처들
원호의 이야기
눈앞에 달력을 넘기다 보니 남은 장수가 얼마 없음에 새삼 씁쓸했다. 시간은 참 쏜살같다. 센치함이 몰려왔지만 나는 계절을 타고 분위기를 잡을 수없었다. 쳇바퀴 속에 햄스터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야 한다. 해바라기씨라도 간수하려면 달려야 한다. 이런 세속적인 나를 탓하기에는 눈앞에 카드 명세서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잠시 거치고 나간 월급의 흔적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다. 전화기를 열어 내린 스크롤 중에 마음 편히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 내 선택은 원호였다.
귓가에 울리는 신호음이 길게만 느껴지고 혹시 이 자식한테도 외면받는다면 왠지 슬플 것 같았다. 통화 종료의 유혹의 찰나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 형 또 술 먹자고 전화했어. 간 좀 챙겨라. 작년 건강검진에 간수치도 안 좋았는 인간이. 20대가 아니에요. 당신 인제 늙었어요"
웃기게도 이 쉴 새 없이 뱉어내는 잔소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고요한 외로움의 적막을 깨는 것 같아 오히려 반가웠다.
"야 숨좀 쉬고 쏘아붙여라.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뭔 잔소리가 우리 엄마급이야. 네가 우리 엄마보다 더 하다. 내 간수치는 내일 아침 운동하며 관리할 거고 일단 치맥 어때. 콜?"
"치킨은 음 일단 노. 어제 먹었고 일단 나 배불러. 그냥 우리 동내 편의점에서 새우깡에 소주 한잔 하자."
"오케이. 내가 근처 가서 연락할게 바로 튀어나오니라."
원호의 동내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충분히 걸을만한 한 거리였다. 후드티에 점퍼를 입고 귓가에 에어팟을 꽂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흥얼흥얼 가사를 따라 하면서 걷다 보니 금방 도착하였다.
일단 편의점에서 참이슬 두병과 새우깡을 손에 집고 더 주전부리로 먹을 안주가 없는지 두리번 되었다. 천하장사 소시지가 유독 눈 맞춤을 맞이하였다. 결국 나는 그것을 몇 개를 집고 육개장 컵라면 하나를 추가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지갑을 깜빡해서 내심 걱정을 했다. 카드야 페이로 결제하면 되는데 혹여나 신분증을 보여달라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역시 혼자만의 기우였고 착각이었다. 내 나이는 얼굴로도 증명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꽤나 동안이라 생각했는데 늙기는 늙었구나. 결제를 하고 빨대 두 개를 챙겨 나왔다.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원호에게 전화했고 5분이 채 되기 도전에 우리는 마주했다.
"이 노친 내 천하장사는 왜 샀어? 그리고 빨대는 뭐야? 소주잔은 안 샀어?"
"아 그냥 옛날 생각나서 참 예전에는 엄청 먹었는데 나이 들고나니 이 맛이 어떤 맛인지 기억이 안 나서. 빨대는 술 따르고 하는 거 귀찮잖아 그냥 소주에 꽂아서 먹자."
말을 내뱉고 나서도 내가 어이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원호는 고개를 절로 절레흔들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그렇게 빨대로 소주를 마시면서 하루하루의 찌꺼기들을 한탄했다.
"원호야. 나 참 나이 들면 뭐 있을 줄 알았다.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떡뚜꺼비 같은 자식들도 있을 줄 알았어. 근데 개뿔 있는 거라고는 카드값이랑 외로움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다. 서른 넘으면 조지 클루니 같이 중후한 매력을 가질 거라 생각했는데... 배만 나오고 주름만 생기네."
"뭐 나라고 다르나 다 똑같지. 너무 자학하지 마. 그래도 형은 생각보다 꼰대처럼 나이 들지는 않았어. 그리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뭐 그런다고 조지 클루니는 안 되겠지만."
내게 서른은 기다림의 나이였다. 내가 그 숫자에 도달하면 자연스레 매력이 구비되어 인생이 꽤나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살 한 살 먹는 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른을 훌쩍 넘고 매력은커녕 성한 곳이 없다. 건강검진에 과음으로 인한 지방간 업무의 스트레스로 인한 고혈압 주의 등이 그것들을 반증하고 있었다.
"원호야 넌 안 외롭냐. 너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아직 숫자상 으로는 이십대자나. 왜 아직도 혼자 청승 떨어. 쓸쓸함과 외로움은 내 몫인데."
" 내 걱정 말고 그 형도 누구 좀 만나. 아직도 개 때문은 아니지. 까놓고 형이 뭘 그리 잘못했는데 이것저것 다 맞췼자나. 아직도 미련 있어 잊어버려 끝난 거라고 왜 못 버리는 거야."
매서운 스파이크가 가슴을 강타했다. 누군가를 만나려고 한 적은 있었다. 윤서와의 이별 이후 몇 번의 소개팅을 하였지만 마음의 끈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꼬여있는 실타래를 풀지 못한 것이다. 말없이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쓰라림이 목구멍을 넘겨져 가슴에 다가왔을 때 뜨거움이 느껴졌다.
"내가 뭐 그렇지. 답답한 인사자나 그러니까 이모양이지. 너는 보건의 얼마나 남은 거야. 학교 애들이랑은 아직도... 아니다 내가 술이 되었기는 하네 말이 헛난 온 거 보니 한잔하자. 짠"
일순간 나의 말에 그늘이지는 원호의 얼굴을 보았다. 아 실수했다. 내가 건들지 말아야 할 환부를 눌러버렸다. 정신을 차려라 한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돌이키려 했지만 늦은 것 같았다. 바닥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림자 같은 애써 망각하고 있던 원호의 마음의 상처들이 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학교라는 단어였다. 왠지 오늘 밤은 길고 슬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