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Thursday, a new word
다름
1. 별다른 것.
2.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점.
예) 그 사람의 생각은 나와 다름을 인정한다.
“나와 다름을 인정한다. “
세상에는 완벽하고 멋진 표현들이 많다. 이런 단어나 문장 또는 글을 알게 되고 내 일상에 ‘적용’했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면 나는 ‘멋지다’라는 단어도 함께 가진 듯 뿌듯해진다. 하지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은 멋지기보다는 후지거나 유치하거나 이불킥 같은 흑역사로 만들어진다. 나와 '다름'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쉽다. 입이 안되면 손으로. 손이 안되면 표정으로. 표정이 안되면 몸짓으로. 아무튼 꺼내놓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꺼내놓은 말(위에서 나열한 말과 결을 같이 하는 모든 표현들)을 내 마음과 일치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심으로 이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상대를 대하는 것보다는 피상적인 말로 이해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순간을 넘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논쟁해야 하는 피곤한 에너지를 쓰기 싫으니 머릿속으론 아니라 생각해도 바쁜 현대사회에서 귀찮음을 없애고 내 에너지를 지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한다.
나는 이 다름을 받아들이려 ‘노력’은 하는 사람이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만났을 때 위에서 말한 꺼내놓는 말과 마음을 일치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은 말 그대로 다름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데 자신이 맞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한 누군가는, 옳은(실제로는 아닐 확률이 높은) 본인의 생각을 나에게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데 이런 거만한 시선은 신기하게 금방 알아챈다.
내가 이 다름을 이해하게 된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흔한 ‘밥 먹자’가 있다. 애정이 없는 상대의 밥 먹자는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인사치레로 정의된다. 그런데 호감이라는 필터가 씌워지는 순간(이성이든 동성이든), 나는 이 인사치레와 진심을 구분하는 것이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지 말지를 수십 번 고민했던 것처럼 어려웠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같이 밥이 먹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답은 하나뿐인 OX 문제이지만 상대의 답은 진짜 밥을 먹고 싶은 것일 수도, 인사치레일 수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서술형’이기에 그 결에 맞는 답을 적어야 한다. 한마디로 눈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과거의 나는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을 거라 믿어 상대도 나를 애정한다면 당연히 진심일 거라는 전제하에 적극성을 십분 발휘했다. 이럴 경우 시트콤이 만들어진다. 나는 톰, 상대는 제리. 갑자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이성과의 미묘한 줄다리기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이 장면은 꺄르르 웃음이 나오는 코믹이지만, 장면 속 주인공인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더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중이다. 당시 내가 애정했던 한 상대는 결국 나의 적극성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찬 거절을 보여줬다. 끊어진 관계로 남는 슬픈 엔딩이 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 불찰은 이전보다 조금 더 벌어진 거리감으로 돌아왔다.
상대를 애정한다면 상대의 ’나와 다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도, 행동도, 뜻도 잘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한쪽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맞은편의 사람도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겠지만. 한쪽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는 소모성이 짙어져 결국 끝을 가지게 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건 한마디로 겸손해지는 거다. 본인의 자신만만함이, 앎이, 능력이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무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저절로 익은 벼가 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은 멋지다. 내 바운더리 안에 애정이라는 필터가 씌워진 사람들은 멋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닮아서 멋져지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