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렛 Oct 20. 2020

결혼이 외로움을 구원할 수 있을까?

혼자가 싫어 결혼했는데 혼자이고 싶어진 현실

삼십 대 후반,
친구가 외롭다고 했다


싱글인 친구를 만났다. 모태솔로에 가까울 만큼 연애 경험이 적은 친구였다. 남자를 불편해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자 전혀 애쓰지도 않는 타입. 그런 친구가 얼마 전 소개팅 앱으로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마음에 들었지만 애프터는커녕 잘 들어갔냐는 연락조차 없었다고 했다. 우리보다 5살 어린, 삼십 대 초반의 남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더 어린 여자 좋아하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었다. 왜 우리 나이가 어때서? 삼십 대 후반 싱글 여성은 연애하기 왜 좀 ‘어떤’ 나이인 걸까? 슬프게도 꽤 많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 같았다.  

친구는 외롭다고 말했다. 계속 이 상태로 외롭게 살게 될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생전 그런 얘기를 하지 않던 그 친구도 외로움에 그리고 시간에 굴복당하고 있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속 한 장면, 출처 <MBC>
그러고 보니 나도
외로워지기 싫어서 결혼했다

나는 서른셋에 결혼했다. 서른 살 정도까진 결혼 생각이 없었다. 혼자라도 너무 행복했다. 세계는 넓고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았다. 그러던 서른한 살, 난생처음 홀로 여행을 떠났다. 유럽이었고, 기간은 열흘이었다. 너무너무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설렜던지. 하지만 혼자 여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즐겁긴커녕 너무 외로웠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내게 잘 맞지 않음을 그때 깨달았다. 좋은 풍광을 보고 함께 환호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때 결혼을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때부터 결혼할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열심히 소개팅도 하고 동호회 같은 모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내가 참여했던 동호회에는 소위 좋은 스펙과 괜찮은 외모 그리고 매너까지 갖춘 남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참여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여자들도 너무 괜찮았다. 그리고 나보다 어린 여자들이 더 많았다. 서른이 넘은 나는 그 집단에서 왕언니 축에 속했다. 그 느낌이 참 싫고 불편했다. 뭔가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괜찮은 여자로 보이고 싶은 내 안의 욕망(?)이 가득한데 나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경쟁해야 한다는 그 느낌이 싫었다. 지치고 피곤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서른두 살이 되면서 더 이상 그런 경쟁은 그만하고 싶어 졌다. 만나고 헤어지고 밀고 당기는 연애가 주는 긴장이 설렘보다는 피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꽤 많은 친구들이 결혼을 했고 아니면 결혼할만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을 나이, 대한민국 싱글 여성에서 평균 이상의 나이대로 진입하고 있는 현실을 실감하며... 나도 나만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만나 안정적인 사랑을 영위하고 싶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혼은 외로움에서
나를 구원해줬을까?

그토록 바라던 결혼을 하고, 확실히 신혼 때는 정말 외롭지 않았다.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베프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루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맘 편히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무척이나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거가 아닌 결혼이었기에 그런 단순한 기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녀 둘이 아닌, 가족이 얽혀있는 결혼은 생각보다 피곤한 이슈들이 꽤 많이 발생한다는 걸 오래 지나지 않아 실감하게 되었다.


평생의 베프라 믿었던, 함께한 날보다 함께할 날이 더 많은 남편이 실망을 줄 때 느껴지는 외로움이란, 싱글의 외로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짙어지기 전에 출산과 육아로 다시 정신이 없어졌고, 이제는 외로움을 느낄 시간이 없어 외롭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다.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한 목표는 달성했으나, 그것이 외로울 시간이 없어서 외롭지 않은 거란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외로움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 이제 나는 적어도 싱글 때처럼 외로울 일은 없어졌으나 반대로 외로울 시간조차 없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쓸쓸해졌다.


혼자가 싫어 결혼했는데
혼자이고 싶어 졌다.

참 이상하다. 혼자가 싫어 결혼했는데 혼자이고 싶어 안달 나는 상황이라니.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물론 아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이라는 존재가 이제 내 인생에서 너무나 큰 행복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다만 그만큼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시간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커지면서 나만의 그것까지 잠식시켜버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 이제와 결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이 또한 나의 선택이고, 어쨌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했던 목표는 달성하였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삼십 대 후반 싱글 여성 친구에게 혼자여도 괜찮다는 말도 할 수는 없다. 그녀에겐 가진 자의 배부른 조언이라 느껴질 테니. 그녀의 외로움은 삼십 대 초반에 내가 느꼈던 그것과 또 다른 농도일 테니. 차마 너의 삶이 낫다고 아니면 나의 삶이 낫다고도 얘기할 수는 없다.


삼십 대 초반 나이적 압박(?)에 휩쓸려 결혼을 결심했던 내가 돌아보면 너무 어렸던 시절임을 깨달으며 지금 삼십 대 후반에 느끼는 생각 또한 사십 대, 오십 대에 보면 또 얼마나 우스울까, 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서 생각하면 의미 없는 숫자적 압박(?)과 그것을 조장하는 알 수 없는 사회의 공기, 아니 어쩌면 내 안의 편견(?) 같은 것에서 대체 언제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까워지는 연말과 새해, 가까워져 오는 앞자리 ‘4’는 숫자는 이렇게 여전히 너무너무 싫은데?

그냥 숫자와 그 숫자가 주는 미션 앞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매만져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시간과 숫자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그것에 조금 위안을 얻어본다.


이전 09화 결혼은 왜 여자에게 더 불리한 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