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모레 마흔, 마흔씨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마흔씨는, 요즘 나이만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다. 돌아보면 서른이 되기 전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때의 고민은 정말 귀여웠다.
"이제 너도 계란 한 판이네?"
"31살? 배스킨라빈스구나?"
뭐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소리를 지르며 격하게 반응했지만, 그때의 마흔씨는 지금에 비하면 꽤 행복했던 것 같다. 서투른 것 투성이던 이십 대보다 훨씬 여유롭고 안정적인 삼십 대를 맞이하며, 변화된 앞자리 숫자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마흔살은 그때랑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이 나이 또한 10년 후 돌아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마흔에 가까워진 지금의 심정은 적어도 서른 즈음보다는 덜 신나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 덜 신나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이 확 밀려온다. 마치 뜨겁게 내려쬐는 햇볕과 흐르는 땀방울에 자꾸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무더운 여름처럼... 전혀 유쾌하지 않다.
갈수록 주름과 뱃살이 늘어나기 때문일까? 그런 몸의 변화만 생기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40이라는 나이에서 느껴지는 중년의 향기가 마흔씨는 몸서리치게 싫었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중년의 범주에 들어서게 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물론 이제 아이 엄마에, 회사에서는 중간 관리자 그리고 아줌마라 불리는 게 당연한 외모지만, 이십 대에 하던 고민들의 답을 여전히 찾지 못했는데... 아직도 내면에는 엄마 품이 제일 따뜻하고 매일 아침 회사에 가기 싫고 유행하는 옷을 제일 먼저 입고 싶은 십 대의 마흔씨가 그대로 살고 있는데... 중년 아줌마라니!!! 억울하고 기가 찰뿐이다.
마흔은 왜 불안한 걸까
서른아홉을 앞둔 12월의 어느 날, 마흔씨는 친구와 나이에 대해 한탄했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 친구는 짜증을 넘어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평생 혼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생각을 하면 진짜 불안해져. 근데 더 불안한 건 50대에도 안정적일 거란 낙관이 들지 않는다는 거야. 그냥 쭉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살 것 같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미혼자에게 주어지는 심리적 부담은 여전한가 보다. 옛 생각에 갇혀, 타인의 결혼과 출산에 간섭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많은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던지는 그들의 말이 당사자들에겐 돌이 되어 날아든다는 걸 알기나 할까? 그런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라 해도, 결혼과 출산으로 바빠진 친구들과 만남도 어렵고 같은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현실... 적극적으로 새로운 만남이나 모임에 참여하는 성향이 아니라면 외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렇다면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 내가 나은 걸까?'
마흔씨는 잠시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마흔씨가 친구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십 대 때 ‘언제부터 일할 수 있을까? 너무 일하고 싶은데’라며 취업을 고민했던 그녀들은 어느새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너무 일하기 싫은데’ 라며 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이 아닌 이상 45세면 퇴직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라는 요즘, 그때부터 뭘 해 먹고살아야 하나 싶은 동시에 그때까지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결혼하지 않은 싱글인 경우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이라면, 결혼 후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기면 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누구도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아프니까 중년이다?
한때 유행어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던 시절, 마흔씨는 ‘찐’ 청년이었다. 취업난이나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그런 기사 속 청년은 아니었지만, 그 책으로 인해 당시의 고민들을 위로받은 느낌이긴 했다. 지나면 더 좋은 시절이 오겠지, 그땐 아프지도 흔들리지도 않겠지라며 스스로를 다그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마흔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물론 당시에 하던 고민은 모두 종결된 상태지만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고민을 안고 새로운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흔들리고 아프고 불안한 건 그냥 나이와 상관없는 인류 공통의 감정인 걸까? 부자든 가난하든, 예쁘든 못생기든 각자의 고민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게 진리인 건가?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 달려있다는 뻔한 결론에 이르렀다.
마흔씨는 서른 살이 되기 전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떠났던 코타키나발루로의 여행이 떠올렸다. 당시 썸남과 삐걱대는 이슈로 도저히 한국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비키니와 산타 모자를 챙겨 더운 나라로 떠났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유쾌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여유로운 바다에서 힐링을 만끽하며 에너지를 잔뜩 채워왔다. 머지않아 그 썸남이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신명 나는 서른 살을 보냈었다.
여행이 모든 것을 바꾼 건 분명 아닐 테지만 복작대는 일상 속에서 한탄한 듯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여행 그 자체가 아닌, 우울한 감정으로부터 누가 먼저 빠져나오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마흔 싫어, 마흔 싫어...”
마흔씨는 이제 가만히 앉아서 마흔 타령을 부르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세상에 아직 아름다운 것도 할 것도 즐길거리도 많으니까. 크나큰 세상과 우주적 관점에서 한 사람의 존재는 그리고 오늘은 작은 점에 불과하니까. 진리를 깨닫고 나면 모든 고민이 부질없게 느껴질 테니까…(라는 서른 살 여행에서의 깨달음을 마흔씨는 되새겨보았다.)
진짜 마흔이 되는 해에, 마흔씨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이는 잠시 잊고, 멋진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리라!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건 그전까지 코로나가 꼭 사라져 주길 고대하는 일뿐! 그리고 서른의 그때처럼 나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뿐! 과연 마흔씨와 친구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여행을 떠날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