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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한손 Jul 11. 2021

세련씨

쿨하지 못한 관계는 너무 촌스럽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세련씨는 뭐든 자연스럽고 적당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특히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부자연스럽게 친해진다거나 쿨하지 못한 관계는 딱 질색이다. 때로 이런 성격이 누군가에겐 차갑고 무뚝뚝하게 느껴지거나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거니까. 오지랖이 넓거나 오버스러운 성격의, 그녀와 상극인 사람들은 인생에서 그저 스쳐가는 타인이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얘기가 달라졌다. 세련씨의 쿨한 관계 따윈, 시댁 식구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시댁은 멀수록 좋고, 없으면 베스트

결혼 전 유부녀 언니들에게 ‘시댁은 멀수록 좋고, 없으면 베스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세련씨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련씨 스타일대로 살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화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댁과 걸어서 3분 거리인 곳에서 호기롭게 신혼을 시작했다.

 효자인 남자는 남편감으로 최악이라는 말도 귓등으로 들었다. 그래서 효자는 물론이거니와 누나에게 그리고 조카들에게 끔찍이 잘하는 착한 아들이자 동생인 남자 친구를(지금의 남편을) 결혼 전엔 참 좋게 봤었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따뜻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시크한 그녀에게는 없는 따뜻함으로 그녀의 모든 걸 품어줄 거라 착각했던 것이다.


고요 속의 외침 “why?”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환상은 깨졌다. 세련씨와 남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서울에 있는 신혼집에 도착했다. 10시간 넘는 비행과 2시간여 공항버스를 타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침대에 내던진 순간, 세련씨 남편은 시댁에 인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세련씨는 왜냐고 물었다. 아버님이 오라고 하셨단다.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한 눈치였다.

걸어서 3분 거리, 잠시 다녀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필요는 있겠지만 피곤한 밤에 왜 굳이 집까지 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 걸까? 전화만 하면 안 되나? 그렇다면 우리 친정 집에도 인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닐까?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세련씨였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갔다.

아버님과 어머님께 어색한 절로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자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밥을 먹으면 좋겠다”

(why??)

차마 세련씨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저 혼자 속으로 고요한 외침을 하고 있는데 두 분은 당황스러운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일부터 세련이는 휴가라지? 점심 혼자 먹지 말고 여기 와서 먹어라”

(why???)

신혼여행을 마치고 남편은 바로 출근했지만 세련씨에겐 일주일의 휴가가 더 있었다. 서른이 넘도록 혼자 살아본 적이 없던 세련씨는 오롯이 혼자 독립적인 집에서 보내는 평일의 낮 시간이 두근두근 설렐 만큼 기대되었다. 그런데 시댁에서 남편도 없이 혼자 점심을 먹으라니? 상상만으로도 불편한 일이었다. 물론 세련씨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란 건 알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려 따르기엔 어렵게 얻은 자유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다른 볼일이 많기도 했고, 결국 일주일간 세련씨는 시댁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내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 후로 몇 달, 세련씨는 거의 매주, 시댁에서 밥을 먹었다.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고 쌀이며 김치며 이것저것 챙겨주셔서 늘 두 손 가득히 돌아왔지만,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함께 하면 할수록 더 자주, 더 많이 무언갈 함께 하기 원하시는 마음이 세련씨에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따뜻하고 좋으신 시댁을 만난 것에 감사했지만 그분들이 다가오실수록 세련씨는 오히려 멀어지고 싶었다.

 세련씨 집안 분위기는 서로에게 쿨하고 독립적이며 표현에 인색한 편이다. 한편 세련씨 남편의 집은 정 반대였다. 뭐 그리 서로 뜨겁고 적극적이며 늘 함께하고 싶은 건지... 결국 세련씨는 그녀의 마음을 솔직하게 남편에게 얘기하고 말았다.


“어머님 아버님이 주말마다 밥 먹으러 오라고 하시는 거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운 것 같아. 우리가 일정이 되면 가고 아니면 못 갈 수도 있는 건데 매번 오길 기대하시고 또 그걸 말로 표현하시는 거 좀 불편해”


세련씨가 생각한 반응은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럼 내가 잘 말씀드려볼게.’였으나 남편은 상상치 못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뭐 얼마나 많은 부담을 줬다고 그래?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싫어?”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그것이 세련씨와 남편의  싸움이었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세련씨는 ‘시부모님을 싫어하는 며느리 되었다. 어쩌다 시댁 얘기만 나오면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었다. 세련씨의 가감 한마디는 남편과 시댁 때문에 겪게  모든 갈등의 서막이  것이다.

유부녀 언니들에게 하소연하거나, 시간을 두고 현명하게 대처했어야 했다고 세련씨는 후회했지만, 이미 강을 건넌 후였다. 그녀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달콤한 남편으로만 생각하고, 그분들의 착하디 착한 아들이란 사실은 잊은 죄로, 세련씨는 모든 화살을 그대로 맞게 되었다.


아이의 탄생, 싸움의 재탄생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세련씨의 그런 위험한 고백(?) 덕에 매주 시댁에 의무적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세련씨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인지, 시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르겠으나, 시부모님의 관심 또한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가 되었다. 세련씨는 오히려 그분들이 편해졌고 남편과 싸울 일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또다시 이슈가 불거졌다.

시댁의 첫 친손주인 세련씨의 아이는 두 분에게 귀하디 귀한 별과 같은 존재였기에, 세련씨를 뒷걸음치게 했던 부담스러운 관심이 다시 전보다 강력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물론 그 관심은 오롯이 아이를 향한 것이었지만, 세련씨 역시 그 사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산부인과에 같이 가고 싶어 하시거나, 시댁에서 몸조리를 하라고 말씀하시거나... 좋은 마음에서 내미는 손을 세련씨는 결코 쉽게 잡지 않았고, 그녀의 명확한 거리두기로 인해 시부모님은 상처를 입으셨다. 남편과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가족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

하지만 결혼 3년 차가 되자 세련씨는 더 이상 남편과 시댁 문제로 싸우지 않게 됐다. 치열하게 부딪혔던 지난 시간들은 세련씨와 남편 그리고 시부모님 모두 처음 겪는 가족 관계에 적응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30 넘게 남으로 살던 사람들이  번의 결혼식만으로  가족이  수 있었을까? 서로 오해하고 부딪치고 당황하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남편이나 시부모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매일 같이  먹고 같이 살던 사람들이었으니, 멀리도 아닌 3 거리에 살게 됐을 때도 거의 한집에 사는 느낌으로 서로를 대했던 거다. 고로 남편은 결혼을 했으나 독립된 가정으로 절대 떨어져 나올  없었고, 원래부터 독립되어 있던 세련씨 혼자만 괴롭고 불편할 뿐이었던 거다.


 어쩌면 지금도 세련씨의 남편과 시부모님은 서로에게 독립할 의사가 없을  있다. 여자 친구 말을 엄청  듣는 착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의 실상은 엄마 말을 끔찍이  듣는 착한 아들이었고, 시부모님 또한 그런 아들에게 익숙하시기 때문이다.



유부녀 언니들이 말해준 효자와 시댁에 대한 조언을 이제야 깨달은 세련씨는 앞으로도 남편은 변하지 않을 것을 지만 이젠 생각보다 괜찮다. 가족이 되는 과정을 벌써 3년이나 지나왔고,  남편이나 시댁은 틀린  아니라 다른 거라는 사실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사람은 고쳐 쓰는  아니라는 출처 미상의 조언을 매일 되새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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