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승진하고 싶냐고? 승진은 인생의 최종 목표니까!
팀장인 승진씨는 칼퇴를 해본 적이 없다. 지난 반년 간 연차는 딱 1번 썼을 뿐이다. 반면 그녀의 팀원들 대부분은 6시 정각이 되면 칼같이 일어난다. 2-3년 전만 해도 6시 30분~7시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6시가 되면 얄짤없이 일어나 가방을 챙긴다. 앞다퉈 나가는 직원들을 보노라면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지만 티를 낼 순 없다. 이제 칼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정시 퇴근'이라 불러야 한다지? '라테는 말이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승진 씨지만 '꼰대'가 되기는 싫기에.. 그저 쿨한 표정으로 관심 없는 척 모니터만 바라볼 뿐이다.
40대도 아줌마는 싫어
승진씨는 올해로 회사 생활 21년 차. 이렇게까지 오래 회사를 다니게 될 줄은 그녀도 몰랐다. 게다가 아직까지 팀장으로 남아있을 줄이야! 친구 중에는 진작 임원을 단 경우도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들을 만날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늘 그녀를 '멋있다'라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힘이 났다. 사회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 누구의 '엄마', 또는 '와이프'로만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스스로가 썩 괜찮게 느껴지곤 했다.
"낼모레 50인데, 나 아직 팀장이잖아"
"어우 야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난 비정규 알바라도 좋으니 사무실에서 일해서 돈 벌고 싶다. 내 직업은 그냥 아줌마잖아"
직업이 아줌마라니, 너무너무 끔찍하다고 승진씨는 생각했다. 중년의 중심에 선 나이지만, 승진씨는 ‘아줌마’라는 말이 아직도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20대 초반 일찌감치 '비혼 주의'를 선언한 신여성이었던 그녀는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런 평범한 삶은 왠지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35살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작은 회사에서 시작해 30대 초반 운 좋게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던 그녀는 모두가 결혼 또는 출산에 집중하던 시기, 일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회사에 있는 게 그저 좋았다. 임원까지 쭉쭉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업무상 불편한 감정이 생기고 그것을 드러내게 될 때마다 ‘노처녀 히스테리'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의견 충돌이 생길 수도 있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다 보면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가 오곤 하는데...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 직장인은 화도 제대로 낼 수 없는 것이 당시 승진씨가 느낀 현실이었다.
분노가 차올랐지만, 지금의 승진씨와 비교도 안 되는 꼰대 상사들이 가득했던 10여 년 전의 회사는 '억울하면 결혼해'라는 분위기였다. 결국 승진씨는 치열하게 선을 보았고, 다행히 지금의 착한 남편을 만나 마흔을 며칠 앞둔 겨울, 결혼을 하게 되었다. 늦은 결혼이기도 했고, 남편도 아이에 큰 생각이 없어 자연스레 '딩크족'이 되었다.
존버는 승리한다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이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는 친구나 동료 워킹맘들에 비하면 아이가 없어 여유로운 본인의 일상이 꽤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40대 중반 정도까지는 승진씨 스스로 행복한 편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접어들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35살 무렵 10년 후엔 나도 임원이 되어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만년 팀장으로 정년퇴직을 고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결혼 5년 차가 넘어가니 남편과 보내는 저녁 시간도 딱히 재미가 없었고, 자연스레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솔직히 승진씨도 하루하루 일하기가 너무 싫었다. 일찍 집에 가서 치맥을 먹으며 드라마나 보고 싶었다. 매주 2번씩 꼬박꼬박 헬스장에 가는데도 체력은 늘 바닥이었다. '내가 이런 몸뚱이로 매일 야근하면서 일하는데 왜 보상이 없는 거야?' 회사에 대한 불만과 회사에 관심 없는 후배 세대들에 대한 얄미움만 날로 늘어감을 느끼며, 갱년기인가 싶어 더 쓸쓸해졌다.
하지만 아직 임원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았다. 승진씨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모토가 하나 있다면 바로 '존버는 승리한다'니까. 20년 넘게 회사를 다니면서 얼마나 위기의 순간이 많았겠나. 그럴 때마다 저 교훈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녀였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런 '존버 승리' 사례는 심심치 않게 봐왔다. 그녀가 존경하는 선배 중 하나가 그 예였는데, 부문장 승진을 코앞에 두고, 회사에서 그 선배보다 10살이나 어린 부문장을 스카우트해 앉힌 것. 1년 여 가슴에 사리가 생기는 시간을 보낸 후, 외부에서 온 그 임원이 추진하던 프로젝트를 뒤로하고 갑자기 나가버렸다. 기회는 다시 그 선배에게로 왔다. 쉰이 되던 해에 결국 그 선배는 그토록 바라던 부문장의 자리에 앉았다.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 선배를 축하해주며 승진씨는 존버는 승리한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회사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워라밸을 보장해달라고? 회사가 곧 삶이자 자기 자신인 승진씨는 ‘워크 앤 라이프의 밸런스’보다 ‘워크 이즈 라이프 밸류 = 일이 곧 삶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승진이 아니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믿으며 오늘도 존버 하는 중이다. 그녀는 과연 그 선배처럼 승리하고 웃을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삶의 밸류를 높여주는 행운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