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또 엄마가 되어 아이를 사랑한다.
“아빠 싫어! 엄마만 좋아!”
사랑씨의 네 살 된 딸 하늘이는 매일 아침 이 대사로 하루를 연다. 잠든 아이와 남편을 두고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온 사랑씨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출근 준비를 할 때면 어김없이 멀리서 딸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리고 머지않아 남편은 사랑씨 옆으로 하늘이를 안아다 준다. 잔뜩 부은 눈을 비비는 덜 깬 아기의 모습은 참 사랑스럽다. 사랑씨는 드라이기를 잠시 끄고 사랑을 담뿍 담아 하늘이를 안아준다.
“아구, 우리 딸 잘 잤어요?”
“응! 내가 엄마 머리 말려줄래”
“아냐 아냐 뜨거워 조심해야 해 하늘아”
“그럼 엄마 화장 도와줄 거야”
“아냐 아냐 하늘아 이거 엄마 안 발라도 돼”
“아냐 발라줄 거야. 이거 열어줘~~”
“후… 제발!!”
…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누릴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랑하는 이와의 따뜻한 포옹… 뭐 그런 것과는 너무 다르다. 아기와의 보드라운 스킨십이 주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여유 같은 건 없다. 운이 나쁘면 머리를 감다 말고 아이를 맞이해야 하는 날도 있으니 머리를 감기 전에 잠에서 깨지 않은 아이에게 감사해야 하는 아침. 그렇게 또 워킹맘 사랑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9시부터 6시, 비록 일에 치여 정신없게 지나가는 시간들이지만 사랑씨만의 개인적인, 어른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하루 24시간 아이와 함께 온종일 보내야 했던 육아휴직의 나날들에 비하면 지금의 삶이 훨씬 만족스럽다. 물론 하늘이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무려 9시간 동안 엄마를 보지 못하는 데다 그 외의 시간 또한 엄마와 노는 시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외출 준비를 하느라 바쁘고, 저녁에는 또 정신없이 집과 어린이집을 오가고 저녁 식사와 목욕 잘 준비 등 할 일이 많기에.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해 놀이하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이나 될까? 그래선지 점점 하늘이는 밤에 더 놀고 싶다고 자기 싫다고 징징대는 일이 잦아졌다. 마음이 짠하면서도 피곤한 사랑씨는 빨리 자자며 하늘이를 다그쳤다. 늘 전쟁을 치러야 고요한 밤을 맞이할 수 있는 나날들 가운데 사랑씨는 생각했다.
‘돈이 많아 맞벌이를 안 해도 된다면, 남편의 수익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면, 아이와 내가 매일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럴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돈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사랑씨 엄마가 늘 ‘결혼은 돈 많은 남자랑 해야 한다’고 말해온 이유만큼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경제적 이유로 남편을 탓할 생각은 없다. 사랑씨 역시 부자가 아니고, 엄청난 능력가나 엄청난 미인도 아니기에.. 남편의 능력이나 부를 탓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남편과 똑같이 밖에서 일하고 똑같이 돈을 버는데 육아는 사랑씨가 훨씬 많이 하고 있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물론 남편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이는 늘 아빠보다 엄마를 찾기에, 사랑씨는 늘 남편보다 피곤하다.
"오빠가 아기도 좀 재우고, 목욕도 좀 시키고 그러면 안돼?
"하늘이가 나를 싫어하는 걸 어떡해. 엄마만 좋다잖아!"
"...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에휴.."
왜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잠이 들고, 아이가 자다 깨서 울어도 듣지 못하며, 밤이 되면 씻기고 이를 닦여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인지. 같은 부모이고 어른인데 왜 남는 시간에 남편은 핸드폰을 볼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것일까!
사랑씨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이제 하늘이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는 것도 신경이 쓰여 '그냥 말을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알게 된 엄마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하늘이에 대한 미안함이 쌓일 때면 사랑씨는 그녀의 엄마가 생각났다. 사랑씨는 셋째 딸로 계획하지 않은 자녀였다고 엄마는 자주 말씀하셨다. 여유롭지 않은 가정 형편에 애가 셋인 것과 아들 아닌 딸만 셋인 것도 사랑씨 엄마는 부담이셨다고 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랑씨가 뱃속에 있을 때 중절 수술을 하러 산부인과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오셨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환경 때문인지 사랑씨는 엄마에게 특히 '아들 같은' 딸로 속한 번 썩이지 않고 자란 효녀였다. 이에 지금 사랑씨의 엄마는 사랑씨를 특히 아끼시며 그때의 일을 웃으며 말씀하시지만, 사랑씨는 그런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어린 시절 사랑씨가 기억하는 엄마는 마냥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니 '화가 많은' 엄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사랑씨가 6살 때부터 엄마는 일을 하셨고, 사랑씨는 늘 부족한 엄마의 사랑을 채우고자 퇴근한 엄마 옆에 그렇게 붙어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때마다 사랑씨의 엄마는 많이 귀찮아하셨다. 이에 사랑씨는 많이 투덜거리다 자주 혼이 났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로는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철든 딸로 살아온 사랑씨지만, '우리 엄마는 왜 짜증이 많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 답을 찾은 건, 사랑씨가 엄마가 된 이후였다. 지금의 사랑씨보다 더 열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2명이나 더 많은 자식을 기르며, 사랑씨 남편보다 더 육아와 가정에 관심 없는 아빠와 함께 치열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엄마. 화를 그 정도만 내고, 이렇게 본인과 언니들을 잘 길러준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요즘이었다.
지금은 이해하고 존경하는 엄마지만, 그래도 딸 하늘이에게 짜증은 내지 말아야겠다고, 사랑씨는 항상 생각한다. 하지만 잘 되진 않는다. 대책 없는 천방지축 4살과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게 되는 사랑씨였다. 후회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다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너그럽고 지혜로운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매일 생각하지만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랑씨의 엄마는 아빠에게 사랑씨 자매들보다 더 짜증을 많이 내셨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부족한데 육아까지 잘 도와주지 않았던 무뚝뚝한 아빠에게 엄마는 화를 많이 내셨다. 아빠는 미안하다고 늘 말하셨지만 변화는 없었다. 그런 아빠가 가끔 안쓰럽다가도, 엄마와 동일한 마음으로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엄마도 아빠도 다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사랑씨 역시 부족해 보이는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불만을 품지 말자고, 스스로를 매일 다그치지만 잘 안된다. ‘어떻게 하면 부드럽고 현명한 아내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지만 그 또한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오늘도 바쁜 워킹맘 사랑씨는 과연 그녀가 꿈꾸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엄마, 부드럽고 현명한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럼 엄마와 아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긴 하는 걸까? 매일 노력하고 반성하는 사랑씨는 이미 지금으로도 충분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