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따금씩 '아아...', '그랬군요' 하며 내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용한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마치 '상담'이라는 낯선 무대 위에서 나는 50분 동안 말하는 역할을 맡고, 선생님은 듣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말을 늘 주워 삼키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 경험이 매우 낯설고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치유적이었다.
내가 말을 잘 이어가지 못하고 긴장할 때는 필요한 경우 질문을 하거나, 내가 앞서 말한 것들에 잠시 머물러야 한다고 판단될 때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님이 경험한 느낌을 나에게 되돌려주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속으로 '세상에 내가 이렇게나 말을 많이 하다니!' '이렇게 한 시간 내내 가만히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하며, 이 생경하고 낯선 경험에 감탄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정말로 따뜻했다.
물론 상담사는 듣는 일 자체가 직업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상담자가 사실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데, 듣는 척만 하고 있다면 내담자들은 단번에 알아챈다. 그것이 가짜임을.
인본주의 상담의 대가인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는 상담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자 심리 치료 핵심 원리로 진솔성, 공감적 이해와 경청,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이 세 가지를 강조했다. 이 세 가지 태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된다. 진솔한 태도로 내담자의 말을 듣게 되면 상담자는 내담자의 마음을 저절로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면 더욱 귀 기울여 경청하게 되고, 진실로 경청하게 되면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긍정적 존중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
물론 이는 이론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담자도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가진 미약한 사람이기에 잘 듣지 못할 때도 많다. 그리고 상담이 끝나고 나서 밀려오는 후회와 아쉬움, 자책, 미안함 등의 감정을 처리하느라 심난해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상담 선생님의 잘 들어주는 태도에 마음이 열렸고, 그로 인해 라포가 잘 형성되어 이후 상담이 잘 이어졌지만,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하는 내담자들도 많을 것이다.
나에게 상담을 받았던 내담자들 중에는 상담사인 내가 주로 듣거나 질문만 하고,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직접적으로 답답하다고 말하는 내담자는 거의 없다. 내담자들은 대부분 상담사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에둘러서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내담자들이 언뜻 그런 마음을 내비칠 때 상담자인 나도 무언의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다.
'아 내담자가 지금 답답해하는구나. 이 상담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못 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돕고 싶은 욕구, 쓸모없는 상담사가 되고 싶지 않은 불안 등에 떠밀려 내담자가 원하는 조언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아차' 하고 깨닫는다. 이 조언이 내담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물론 모든 종류의 조언을 삼가는 것은 아니다. 상담자의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 정보에 대해서는 고민 없이 필요한 조언을 들려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인생에 일개 상담사인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하게 되는 종류의 조언이다).
다행히도 내담자들은 똑똑하다. 내가 나의 심리적인 압박을 못 이겨 함부로 던진 조언을 기분 좋게, 곧바로 '오케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분 나빠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내담자들은 상담사가 시원한 해결책,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면서, 왜 조언을 해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조언을 원한 것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이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지, 때려치워야 할지에 대해, 상담사가 알려주길 원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답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다. 해답을 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마음 이면에는 어쩌면 '난 지금 정말로 이 문제를 간절히 해결하고 싶어요. 그러니 내 얘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잘 들어주세요' 하는 속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조언이 아니라 진심 어린 경청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