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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Oct 21. 2023

손으로 쓰는 글_환대

걸음마기의 재미에 푹 빠진 아이는 요즘 바깥세상을 제 두 발로 걸으며 탐색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가을 낙엽이 바닥에 떨어져 밟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 내는 것이 신기해 낙엽을 좇아 발로 밟고 다니며 즐거워한다. 또 오후 서너 시쯤 안온하게 늘어진 해가 드리워내는 그림자가 신기한지. 제 그림자를 조용히 관찰하며 혼자 걷는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요즘 내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아기와의 산책은 이전에 나 홀로 하던 산책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다. 나 혼자 산책은 '내'가 걸으며, 보고, 느끼고, 듣고, 산책하는 것에 그치지만, 아이와의 산책은 낯선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며, 나와 아이, 그리고 타인으로까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아파트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선글라스 아저씨는 볼 때마다 빙긋이 웃으며 손인사를 하고 가신다.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기가 궁금하셨는지 얼굴 좀 봐도 되냐며 요즘 아기 보기 힘들다고 말을 시작하신 할머니. 아이가 우유팩을 꼭 쥐고 야무지게 마시는 모습을 보며, 똘똘하고 자기주장이 강할 것 같다고. 그런 아기일수록 칭찬을 많이 해줘야 한다는 조언을 남기고 훌훌 걸어가신다. 오늘은 놀이터 데크 바닥에 널브러져 핸드폰 보며 놀고 있던 시크한 검은색 무리의 중학생 누나들을 마주쳤다. 누군가 아기가 귀엽다고 한마디 했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누나들 안녕" 해봐 했더니, 아이가 손을 흔들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대여섯 명의 누나들이 우르르 아이 앞으로 와 우리를 에워싸고 덥석 손도 만져보고 "피부 진짜 부드럽다. 어머 여기 손톱도 있네." 하며,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낯가림이 있는 편이라 엥-하고 울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누나들의 관심이 싫지 않았는지 가만히 즐기고 있다가 아이가 먼저 제 갈 길을 나선다.


"(부모로부터) 존재할 권리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은 자신을 위해 어떠한 것도 바라거나 욕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 Carina Grossmark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이 태어나 아기로 성장해 나가며 부모와의 원활한 관계, 신체적, 정서적 돌봄과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할 권리를 부여받고,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거나, 욕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한채 살아가게 된다고 본다.


온전하게 존재할 권리를 부모로부터 부여받는다고 하는 건 참 무겁고 어쩌면 불편한 말이다. 애초에 자신의 출생을 비롯해 부모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를 만난다면 평생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한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영유아기에 경험한 심각한 학대와 방임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혼돈 속으로 밀어 넣으며, 그녀/그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현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이를 바로잡는 일은 정말 피를 깎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만 있다면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단지 생물학적 탄생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는 '환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이를 일컬어 성원권(membership)이라 부른다.


아이와 매일 산책을 하면서 낯선 이웃들에게 받는 소소한 환대가 나를 어엿한 한 아이의 엄마로, 아이를 이 세상의 귀한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해주고 있었다.  



* 참고 자료 : Carina Grossmark(2023) "Mothers, Daughters, and Hatred: The Void in the Mirror", Psychoanalytic Psychology, 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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