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흔적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작별하지 않는다> 중, 한강
뒤늦게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한강 작가 본인이 추천하는 책은 항상 자신이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이라고 하기에 고른 <작별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 아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어느새 내 일상과 감정에 깊숙이 스며들어 차분하면서도 가라앉고 무겁긴 하지만 어딘지 따뜻한 정서를, 마치 아궁이에 군불 지피듯 피워 올리고 있다.
새에 관한 구절을 읽으며 나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것도 꽤 많은 사람들을. 상담에서 만난 내담자들을 비롯해 내 주변 가까이에 있는 가족, 친구, 그리고 나 자신도 떠올렸다. 겉으로 봤을 땐 무탈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파도 아프면 안 되니까 본능적으로 견디는 사람들. 그러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떤 사건이든 뭔가 일이 벌어져야만 사실 자신이 그동안 전혀 괜찮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을.
건강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흥미와 성향보다 부모의 욕구를 우선시하도록 길러진다. 경계선 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 기타 심각한 정신질환을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이 기쁨을 주지 못하거나, 부모가 원치 않는 행동을 했을 때, 가혹하게 벌을 주거나, 거절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자녀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웰빙(well-being)을 챙긴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남들보다 관대해서가 아니라 실은 두렵기 때문이다.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거절당하거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의 배려에는 확인과 인정이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고 기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People-pleasing)의 배려에는 반드시 인정과 칭찬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들이 당신에게 선물이든 배려든 뭔가를 주는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면 이들은 건강하지 않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것을 반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또다시 트라우마를 재경험할 수도 있다.
- <People-pleasing as a Symptom of Childhood Trauma>, Daniel S. Lobel Ph.D.
유난히 다른 사람들을 잘 챙기면서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누군가를 만나면 빈손으로 오지 않고 손에 꼭 뭐라도 들려주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했을 때 비로소 안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므로. 생존의 문제이므로. 절박한 심정으로, 열심히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배려하고, 웃음 짓게 해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애쓰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관계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균열이 생길 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내가 이렇게나 최선을 다해서 해주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하며 본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함과 상대를 실망시켰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지는 않았을까.
새들은 날기 위해 몸무게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뼈에도 구멍이 있고, 위도 아주 작다고 한다.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먹이와 물의 양이 아주 작기 때문에,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순간에도 횃대에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있는 새를 상상해 본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횃대에서 추락하는 새를 상상해 본다. 이십 그램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존재의 고요한 추락.
희미하고 아득한 표정으로 슬픈 이야기를 웃으며 마무리짓던 그녀의 선선한 미소가 떠오른다. 늘 웃는 얼굴 사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멍한 그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횃대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떠오른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했으면 좋겠다. 여기 잠시 앉아서 쉬어갈 자리와 마실 물이 있다고. 혼자 벌벌 떨며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