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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Apr 20. 2021

마인드풀(mindful) 라이프

심리적 방어기제 6편_주지화(intellectualization)

탁-탁-탁-.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는 장마철 빗소리, 아기처럼 연한 노란빛을 머금은 어느 봄 오후 네시의 햇살, 비 오는 날 젖은 양말을 벗고 새 양말로 갈아신었을 때의 신선함, 한여름 흠뻑 땀 흘리고 들어와 시원한 물로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의 상쾌함, 파란 하늘 위에 그림처럼 떠가는 흰 구름,  부드러운 미풍에 느리게 산들거리는 초록 나뭇잎, 나무들이 단체로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붙었다 떨어지며 내는 경쾌한 소리, 곱게 간 커피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동그란 케이크처럼 부풀어 오르며 퍼지는 향기, 모카포트에 에스프레소가 느리게 차오르며 내는 쉬익-소리, 분갈이할 때 손 끝에 만져지는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흙의 촉감, 긴 산책 후 종아리에 옅게 퍼지는 근육의 당김, 부드러운 이불에 맨 살이 닿을 때 느끼는 안락한 포근함 등등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나는 매일 달리 경험하는 다양한 느낌들 속에서 오늘도 잘 살아있다고 느낀다. 내 몸의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일상 속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 내가 원하는 행복의 모습과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깨닫기 전에도 이 느낌들은 나와 함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함께 하고 있었지만, 미처 알아차려지지 못한 채 내 곁을 무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에 늘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대화할 때도, 쉴 때도. 여러 가지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잡생각부터 일에 대한 생각, 그날 있었던 실수, 불쾌했던 대화, 갑자기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내일까지 마쳐야 할 일, 그 사람은 왜 그럴까, 그녀는 잘 지낼까, 이유를 모르는 그러나 끈질긴 현재에 대한 불만족, 막연해서 불안한 미래, 삶에 대한 의미 등 생각은 멈추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날뛰어 다녔다.


그래서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들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딴생각에 빠져있다 지하철 정거장을 놓치기 일수였다. 머리가 쉬지 못하는 엔진처럼 분주하게 돌아가다 보니 몸이 고생스러웠다. 만성피로, 소화불량에 변비를 달고 살았고, 심하게 체하면 소화제로 해결되지 않아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일상이 반복되곤 했다.


나의 머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이해해야 할 것들, 알아야 할 것들로 채워지느라 늘 과열돼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언가를 행동으로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책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텍스트로 설명된 것을 보고 납득이 되면 안심이 된다. 삶에서 이해되지 않는 경험들을 마주하게 되면 누군가는 "이게 뭐야?" "왜 그러는 거야?"라고 대응하거나 행동에 나서겠지만, 나는 그런 순간에도 책을 찾아보며 "나에게 지금 생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지?" 또는 "나는 지금 왜 이렇고 쟤는 또 왜 저럴까"를 중얼거리며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경향을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정서적인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때 감정을 빼고 이성에만 의지해 처리함으로써 심리 내적인 갈등을 회피하려는 것을 말한다.


주지화 방어기제를 쓰는 사람은 격리(isolation) 방어기제를 쓰는 사람과 달리 자신이 경험한 일에서 느낀 감정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마치 제삼자가 말하듯 무미건조하게 말해서 듣는 사람에게 그 감정이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말하는 사람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인데 그것이 타인에게 전달되지 않으니,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에 마음의 외로움이 더해진다.


주지화가 가진 장점도 있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주지화로 해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자기에 대한 이해가 생겨난다. '아, 내가 과거에 이러저러한 경험을 했는데, 이것이 어떤 심리 작용을 거쳐 지금의 나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미쳤고 지금 이것이 요러 저러한 문제가 되고 있구나' 이런 이해 말이다. 하지만 내 문제의 원인을 머리로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과 그것이 해결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이것이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멀고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이해'라는 머나먼 강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함께 할 때 비로소 건널 수 있다


결국 내가 머리로 이해한 것을 가슴으로 진짜 리얼하게 느끼고 체험할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느끼는 것이 무엇이 어렵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야 할 경험이 고통스러운 것일 때는 결코 쉽지 않다. 트라우마에 해당하는 경험들은 거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가깝다. 그래서 반드시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대상과 함께 느껴야 한다. 안전한 대상은 우연히 만난 낯선 은인일 수도, 가까운 지인일 수도,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처음 만난 심리상담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이다.


나도 그 머나먼 강을 안전한 사람들과 함께 건넜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자 기적처럼 일상의 기쁨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봄날 새싹처럼 순수하고 감사한 즐거움이었다. 강을 한 번 건너기만 하면 끝이라면 인생이 지금보다 얼마나 살기 편하겠느냐만은, 내 앞에는 또 다른, 건너야 할 다른 강들이 또 여럿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보다 덜 두려운 것은 내가 내 몸을 통해 전해오는 감각과 마음으로 울리는 느낌들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깨달을까?
 나의 존재감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나?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당신의 몸과 마음에서 전해지는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느낌'들을 그냥 한 번, 묻고 따지지 말고, 믿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느낌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혹은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지금, 당신 주변을 어떤 소리들이 채우고 있는가? 당신의 눈과 귀와 촉감을 편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는가? 그러면 잠시 그 순간에 머물러보시기를. 지금 여기에서 흘러가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음챙김(mindfulness)을 하는 동안 복잡했던 당신의 머릿속이 아주 잠시 라도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감각과 마음을 통해 전해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들을 믿고 그 느낌을 정직하게 따라가다보면, 언젠가는 당신만의 진실에 가 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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