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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Oct 20. 2020

《트랜짓 (Transit, 2018)》영화해석

유럽 난민에 관한 어제와 오늘

[줄거리] 게오르그(프란츠 로고브슈키)는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비시정부가 있는 남부 프랑스로 피신 가려고 한다. 게오르그는 자살한 바이델 작가의 가방을 갖게 되고서 다리를 다쳐 생사를 헤매는 작가 하인츠를 데리고 출국비자를 발급해주는 니스와 마르세유 중 마르세유행 기차에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바이델의 가방을 열어보니 작가의 원고, 아내가 보낸 편지, 멕시코 대사관에서 보내온 비자 발급 허가서를 발견한다. 마르세유에 도착해보니 하인츠는 이미 죽어있고 혼자 멕시코 대사관을 찾아간다. 그는 처음에 그저 가방을 주고 사례금을 챙길 생각이었지만, 대사관 직원이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한다. 멕시코대사는 독일군이 엑상과 카시스에 수용소를 짓고 있으니 빨리 미국과 스페인 경유 비자를 받으라고 충고한다. 그리고는 바이델을 위해 준비한 멕시코행 선박표와 여행 자금을 건넨다.


한편 게오르그는 마인츠의 사망 소식을 청각 장애인인 아내 멜리사와 아들 드리스에게 알리고 아들 드리스(릴리언 뱃맨)를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천식이 있는 드리스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게오르그는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의사 리차드(고데하르트 기제)를 방문하는데, 그 곁엔 계속 마주쳐온 여인 마리(파울라 베어)가 서있다. 곧이어 게오르그는 마리 역시 마르세유로 넘어올 자신의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게오르그는 그녀에게 점차 빠져들고 함께 멕시코로 떠날 준비를 한다.




1.1940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의 재해석

동독 작가 안나 제거스가 나치 하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며 쓴 소설 <통과비자(Transit, 1944)>이 원작이다. 다만 감독은 극의 배경을 1940년이 아닌 현재로 옮겨 재창조했다.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인데 시대착오적인 묘사고 의도된 연출기법이다. 2020년 공간에서 펼쳐지는 1940년대 이야기 (현대에도) 동일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극중 드니스의 집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북아프리카 난민들이 대신 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인 스스로 유럽을 떠났다면, 지금은 북아프리카인이나 아랍인이 유럽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2차대전과 오늘날의 난민 문제를 동일선 상에서 다뤘다.


제목 <트랜짓>은 ‘경유, 환승’의 의미를 가졌지만, 영화에서 ‘통과비자’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 출국비자를 받으려면 도착할 목적지를 증명하는 통과비자를 제출해야 한다. (통과비자를 받으려면) 우선 체류 비자를 받아야 하고, 재산 유무나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받을 수 있다. 체류, 통과, 출국비자를 모두 받으려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덧 출국비자가 만료되어버려서 다시 체류비자부터 재발급을 받아야 하는 무한 루프가 반복된다. 이것이 원작 소설의 내용이다. 


게오르그는 기차에서 죽은 마인츠의 아들 드리스를 만나러 간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소년과 공차기를 한다. 주인공은 골키퍼를 맡아 소년의 공을 전부 방어해낸다. 소년이 어떻게 다 막냐고 묻자 주인공은 “어디로 찰지 너무 티 나잖아”라고 답한다. 마르세유에 모인 사람들이 공을 차는 소년 같은 것이다. 목적이 뻔히 보이는 것이다. 그 절박함을 이용해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대사관에서 기다리다 심장마비로 응급차에 실려 가기도 하고, 돈이 없어서 구걸을 하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삶의 과정이 체류하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위해) 경유하는 곳이라고 판단내린다. 극중 호텔 주인이 주인공에게 체류 허가증이 없으면 숙박이 곤란하다는 투로 말하자 주인공이 “여기서 머물려면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하란 얘기네요?”라고 되묻는다. 즉, 여기에 머물 거면 여기서 머물지 않을 거라는 증명을 경찰서에서 받아오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불안과 기다림 속에서 경유지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다. 




2. 원고처럼 살게 되는 주인공의 삶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는 난민인 세 주인공을 유령에 빗대 표현한다. 주인공 게오르그는 독일인인데 프랑스에 살고 있고, 독일군에 쫓기고 있는 신세다. 주인공은 바이델의 신분을 빌려야만 통과비자를 받을 수 있다. 마리는 그런 게오르그의 주변을 배회한다. 마리는 함께 멕시코를 넘어갈 남편을 기다리지만,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리처드 역시 마리를 버리고 배에 올랐지만, 결국 마르세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세 인물을 통해 존재조차 불분명한 난민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본다.


그런데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태도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주요 인물들의 상황을 제3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거리를 둔다. 칼레의 난민 수용소가 철거되던 시기에 영화를 준비하던 페촐트 감독은 바닷가로 떠밀려온 시신들을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고 한다. “촬영할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내가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특수경찰들이 거리에서 촬영하는 순간 내가 난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었다.” 그는 “피난 보따리를 든 사람이 마르세유 항구를 걷다가 호텔에 들어가 ‘파시스트가 오니 여길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했고, 순간 “난민들의 상황, 공포, 트라우마, 한때 마르세유에 넘쳐났던 그들의 역사가 단번에 이해됐다"라고 설명한다. 감독은 난민을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 존재하는 정체성”이라고 정의하며,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영화 속 게오르그로 형상화했다고 밝혔다. 그럼, 감독은 실존(정체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 이것이 영화를 이해하는 길이다.


주인공이 원고를 읽는 장면에서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글에는 미친 사람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거의 모두 사악하고 모호한 것들에 얽혀있다. 거부하는 사람들마저 결국엔 그를 빼닮은 한 인물이 (중략) 그들이 거역하지 못했던 그 운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에 등장인물들이 이해된다.’고 마치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정확히 예언한다. 그 원고가 최종적으로 제3자인 내레이터인 바텐더에게 전달된다는 장면에 다다르면 영화 전체가 ‘바이델의 원고’라는 것을 고백한다. 영화는 원고의 내용을 따라가는 주인공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멕시코 대사가 “누가 먼저 잊었나요? 버림받는 남자? 아니면 남자를 버린 여자?”라고 주인공에게 묻는다. 한편 리처드는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마리를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리처드는 위안을 얻고 싶지만 주인공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리처드는 아픈 드니스를 놔두고 혼자 멕시코로 떠난다고 그를 비난하자 주인공은 ‘아빠가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잠시 후 마리가 합석하고 리처드는 ‘내 아내가 아니다.’고 똑같이 맞받아친다. 가족을 놔두고 혼자 탈출한 죄책감을 물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묻고 있는 것이다.



3. 마리는 왜 바이델을 못 잊는 것인가?

바이델은 사멸해가는 유럽의 문명처럼 보인다. 미국 대사가 주인공에게 글을 쓸 것인가를 묻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글’이 의미하는 바는 문화, 정신, 철학을 총칭하는 ‘문명’이다. 극중 바이델이 자살한 것은 헤겔이 말한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정신’을 상실했다는 의미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2차 대전 이후 유럽은 더 이상 세계의 주역이 아니다. 이것이 영화 곳곳에 죽음과 시체가 출몰하는 이유다.


미국 대사가 왜 공산주의 잡지에 기고했냐고 따지자 주인공은 멕시코에 가서 ‘라디오 TV 수리공’이 되겠다고 답한다. NAFTA 협정 이후 멕시코는 미국 기업의 하청공장들이 밀집한 곳이다. 유럽은 이미 미국 IT기업의 놀이터나 다름없다. 유럽인은 애플의 아이폰을 사고, 아마존으로 쇼핑하고, 구글로 검색하고 유튜브를 시청한다. 가망 없는 유럽을 바라보는 유럽인 스스로의 자조가 섞여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마리는 왜 남편을 찾을까? 마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데, 남편 바이델이 마르세유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유럽인들은 아직아직 세계사의 주역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남편을 찾아헤멘다.



반대로 게오르그(난민) 입장에서 자기가 속인 것 때문에 마리(유럽인)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럽 은 난민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 호텔에서 불법 체류자들이 붙잡혀가는 장면이 이를 설명해준다. 주인공을 비롯한 숙박객들은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방관하는 모습이 현재의 유럽의 처지이고 유럽인이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런 연유로 두 사람은 만난다. 거처할 곳을 찾아 떠도는 게오르그의 등을 누군가가 반갑게 두드리는데, 게오르그가 돌아보자 여인은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듯 웃음을 거두고 빠르게 사라진다. 이후 레스토랑과 멕시코 대사관 등 게오르그가 옮겨가는 장소마다 같은 여인이 잠시 들렀다 사라진다. 난민인 게오르그가 유럽인 바이델처럼 살아가지만, 유럽인은 아니다. 피난민(게오르그)은 유럽(마리)가 찾아 헤매는 유럽 문명이 아니다. 실제 난민들은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고수하며 유럽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그게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다. 2015년 퀼른에서 약 1000여명의 난민신청자들이 현지 여성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은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이를 계기로 유럽사회는 과거 나치처럼 극우정당이 집권하기 시작하고, 난민을 인도적 차원에서 수용하는 정책을 폐기한다. 2차대전의 인종분리정책이 재현된 셈이다. 



4.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 문제를 자초한 유럽의 과거!

유럽이 세계사의 주역이 된 시기는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1492년부터다. 그 전까지 중동이 유럽보다 메소포타미아문명때부터 선진 문명이었다. 그 증거는 서양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리스는 크레타 문명에서 출발했다. 또 알파벳은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에 자리 잡은 페니키아인들이 발명했으며, 터키의 밀레토스라는 곳에서 그리스 철학이 탄생하지 않았던가? 만약 유럽에서는 이교도라로 모조리 불태워버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동에서 전수해 주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과학혁명,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발전이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서가던 중동은 자신들이 문화를 전해준 유럽(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갈등의 씨앗이 심어졌다. 19세기 석유가 발견된 이후부터 중동은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시리아 내전도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을 함께 묶어 국경선을 정한 영국과 프랑스가 1916년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밀약 때문이 아니었던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레바논과 요르단, 팔레스타인은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은 한술 더 떠서 심지어 영국은 몰래 유태인에게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해서 팔레스타인의 뒤통수를 쳤다. 오늘날 불안한 중동의 정세는 유럽 제국주의에서 기인했다. 아프리카 국경선 역시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경쟁하면서 편의대로 정해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영화 곳곳에 녹아들어가있다.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난민이 유럽에 정착했다고 곧바로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1940년 배경인데 2018년 공간으로 표현된 것과 연계되어 있다. 독일이 점령하기 직전인 프랑스치곤 너무 평온하고 일상적으로 묘사된 것조차 제노포비아나 인권보호 명분하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유럽 사회의 불만과 불안이 쌓여있다는 암시이다. 다시 말해 영화 전체가 거대한 부조리와 모순을 꽉 채운 데에는 다 잉가 있다. 바로 유럽의 현실을 우화형식으로 돌려서 담기 위함이다.


극중 라디오에서 엄마가 불러준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가사가 대구(물고기)도, 코끼리도 개미도 다 집에 간다는 내용이다. 어딘가 갈 곳이 없는 주인공의 처지는 쓸쓸하고 애잔하게 다가온다. 이 적막함이야 말로 난민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엮어낸 페촐트 감독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4.1/5.0)


Good : 과거 유럽을 떠났던 2차 대전에 빗대어 다룬 난민문제! 

Caution : 실존과 인류애의 상실에 관한, 형이상학적 미스터리!!


■엔딩곡은 토킹 헤즈의 "Road To Nowhere"다. 매우 적절한 선곡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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