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lockwork Orange, 1971 작품 해설
큐브릭은 영화마다 음악에도 굉장히 절묘하게 운용해왔었다.〈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통해 광활한 우주 대서사시〈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를 부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극 중 사건과는 거리를 두는 소격 효과를 이끈다. 불량스럽지만 영리한 청년 알렉스 드 라지(말콤 맥도웰)는 포르노와 베토벤을 자극의 원천으로 삼고, 러시아어와 런던 토박이들의 운을 맞춘 슬랭을 교잡해놓은 듯한 그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중산모자와 낙하복을 입은 알렉스 일당이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의 경쾌한 선율에 맞춰 패싸움을 벌인다. 어떤 저택에 들어가서 남편(패트릭 마지)을 꼼짝 못 하게 만든 후 아내(애드리엔 코리)를 강간하는 장면이다. 그동안 알렉스는 ‘Singin’ In The Rain’을 목청껏 부르며 부츠 신은 발로 박자를 맞춘다. 이건 말콤 맥도웰의 애드리브이었다. 이 장면을 찍을 당시 큐브릭이 맥도웰에게 아무 노래나 불러 달라고 주문했는데, 맥도웰은 노래를 잘 못 외우는 타입이라 그나마 외우고 있는 'Singing In The Rain'을 즉흥적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때, 긴 코가 붙여진 가면을 쓴 알렉스는 성기도 상징하지만,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코를 은유한다. '섹스'를 죄악의 근원으로 삼은 큐브릭 답게 알렉스가 커다란 성기 모양의 조각상은 그녀의 머리를 짓뭉갠다. 결국 그가 체포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레코드 샾에서 만난 두 여성이 아이스 바를 핥고 있는다던지, 알렉스가 마시는 우유는 마약과 정액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영화초반부는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후반부는 정치철학적인 함의를 품고있다. 2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알렉스의 애청곡이자,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을 담은 베토벤의 9번교향곡 4악장〈환희의 송가〉는 영화 주제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팝아트적인 미장센과 알렉스의 고상한 취미 역시 권태를 덜기 위해 그저 악행을 일삼는 행태와는 동떨어져있다. 이처럼 역설적인 부조화를 통해 관객들은 알렉스의 폭력성에 대한 이성적인 관찰을 유도한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알렉스의 비행, 수감 생활, 루도비코 실험 과정, 석방 이후 행적들로 4부 구성이다.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은 크게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을 대조시킨다. 바로 사적 범죄행위와 국가 혹은 권력에 의한 조직적 폭력이다. 전자는 악한 본성을 지닌 알렉스 본인이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범죄고, 후자는 그에게서 범행 의지를 박탈하는 루도비코 실험이다. 물론 [시계태엽 오렌지]는 후자에 주목한다.
알렉스는 감독에서 빨리 출감되기 위해 정치선전용 범죄예방 실험에 겁 없이 지원하는데, 이때, 실험대상을 찾으러 교도소를 방문한 내무장관은 도열한 죄수들을 사열하면서 간수들에게 이 말한다. “범죄자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뭐가 되겠소? 범죄의 집중밖에 더 되겠소? 여기에 있는 보통의 범죄자들은 임상치료로 다루는 게 최선책이야. 처벌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당신들은 그들이 소외 처벌이라는 것을 외려 즐기는 것을 보지 않았소.” 에서 교화 즉, 치유론(재사회론)을 거부한다.
치료소에서 알렉스는 몸을 꽁꽁 묶인 채 집게로 눈꺼풀을 활짝 벌린 채로 약물을 주입받는 실험대상 신세다. 루도비코 실험 결과를 대중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에서 그는 폭력과 섹스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메스꺼운 느낌이 들다니. 전에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보는 게 즐거웠는데.” 의사가 대꾸한다. “폭력은 끔찍한 거야. 너는 지금 그것을 배우고 있는 거지. 네 몸이 배우고 있는 거야.”
목사는 이에 대해 되묻는다. “이 소년에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그는 더 이상 도덕적 능력이 없는 생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장관은 대꾸한다. “우리는 더 높은 윤리적 입장에서의 동기에는 관심이 없소.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범죄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오.” 여기서 범죄를 ‘못’ 저지르는 것과 범죄를 ‘안’ 저지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실험을 통해 알렉스가 잃은 것은 악한 본성만이 아니다. 즉,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공권력이 인간의 개성과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대목에서 형벌에 대한 법철학적 논의를 꺼낸다. 죄수를 처벌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보복론과 죄를 뉘우치고, 교화하자는 치유론(재사회론)의 대립을 금방 떠올릴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미셀 푸코의 명저《광기의 역사》처럼 근대적 훈육방법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것 같다. 르네상스시대까지만해도 긍정하던 광기를 근대에 접어들어서 광기와 이성을 분리하고, 노동력을 중시하면서 광기를 질병으로 치부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권력과 지식이 광인들에게 사회가 정해놓은 표준에서 벗어났다는 죄의식과 열등감의 내면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개인의 의사가 국가의 목표와 합치되지 않을 때의 개인이 처하는 나약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도 연상된다.
개봉 당시 바난의 초점이었던 폭력장면의 강도는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심심할 수 있다. 쟁점들을 하나씩 파헤쳐보자
첫째, 범죄자 미화이다. 일단〈시계태엽 오렌지〉는 알렉스의 내레이션이 영화를 이끈다. 범죄자 알렉스의 시점으로 관객들에게 소개된다. 매우 차분한 톤으로 자신의 심상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평론가들이 알렉스에 대한 관객의 동조를 우려했다. 관객은 알렉스의 악행에 혐오와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가 루도비코 실험을 계기로 수난을 겪은 후 연민을 느낀다. 큐브릭은 알렉스가 세상을 보는 왜곡된 방식을 묘사하고자 광각렌즈를 동원해서 뒤틀리고 단절된 영화 속 세계를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편집 속도를 조작하거나, 역설적인 음악을 깜으로써 관객들이 화면 속 상황과 유리시키고, 공포와 충격을 전달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희생자들을 희회화된 측면이나, 촬영테크닉 측면에서 관객을 알렉스의 시점에 동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왜곡된 채 묘사되는 주변 인물들에 비해서 그를 우월한 존재로 미화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둘째, 큐브릭의 의도와는 어찌 되었건 영화가 공개된 이후 영국에서는 일련의 모방범죄가 일어났다. 비난의 화살은 규브릭에게 집중되었고, 급기야 큐브릭의 가족이 극심한 협박에 시달리자, 큐브릭은 결국 자의로 배급 중단을 요청한다. 큐브릭이 죽을 때까지 27년간 영국에서는 상영 금지령이 발효되었다.
●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말콤 맥도웰이 출연한 <if…>를 보고 그를 캐스팅하기로 결심, 그에 대해 "만약 말콤 맥도웰이 이 영화에 출연할 수 없었다면 나도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하기도 했다고. 반면에 말콤 맥도웰은 처음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 말콤 자신도 '알렉스'라는 인물에 대해 "<시계태엽 오렌지>를 찍게 된 건 나에게 큰 행운이지만, 나는 알렉스의 행동들을 연기하면서 단 한순간도 즐긴 적이 없다. 그는 아주 교활하고 빌어먹을 놈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제목의 의미를 알아보자,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의 의미는 버지스의 소설이 출간될 때부터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버지스조차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 데서 궁금증과 논란은 커졌다. 버지스는 1972년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런던 동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괴상한’(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이라는 말에서 따왔다”라고 밝혔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orang’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뒤 그는 이 제목이 “즙이 많고 달콤하며 향이 좋은 한 유기적 독립체(오렌지)가 기계장치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이 제목은 기계장치와 같은 시스템 속에서 말살되는 개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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