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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Aug 27. 2020

015 내가 좋아하는 것들

이라 쓰고 맛집 리스트라 읽는다



  꼭 초등학교 글짓기 숙제로 쓸 만한 귀여운 주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는 좋아하는 게 참 많은, '좋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데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가 포함되어 있기까지 하니 정말 욕심껏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 논하자면 아마 이 글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네. 그럼 수요일 밤 열한 시 십사 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열두 시 즈음에는 취침하는 걸 목표로 글을 시작해보는 걸로 한다.


  우선 니가 언급한 '음악'에 대해서. 난 노래를 듣고 부르는 걸 참 좋아하는데, 그 정도에 비해서는 사실 아는 노래가 많지도 않고, 하루 중 음악을 듣는 시간도 생각보다 적은 편이야. 근데 돌아보면 시대가 변하면서 그렇게 되어온 면도 있는 것 같아. 음악은 물론 가만히 그 음악을 듣는 데만 집중할 수도 있지만, 주로 일상의 빈 곳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곤 하잖아. 예전에는 내 눈이나 손이나 발이 움직이는 동안 귀가 놀고 있을 때 틀 수 있는 게 음악밖에 없었는데, 요즘은 동영상 컨텐츠들이 많으니 화면에 많이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영상들을 틀어놓는 때가, 음악을 틀어놓는 때보다 좀더 많은 것 같아. 이 얘길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나는 힙합도 좋아하고, 재즈도 좋아하고, 가요도 좋아하고, 인디음악이나 발라드, 알앤비, CCM 등등, 이렇다 할 취향은 사실 없는 편이야. 어떤 음악을 주로 듣냐,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살면서 몇 번 받아봤는데(자주 들을 것 같은 질문이지만 은근히 그렇지 않더라고) 그 때마다 퍽 난감했어.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출했다 귀가하듯 어김없이 돌아오게 되는 음악은 나도 있지. 재즈 연주곡들이야. 이 곡 저 곡 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고민 없이 발이 저절로 길을 찾아드는 것처럼 내 손이 언제나 저절로 택하는 건 Eddie Higgins Trio지. 멜론 앱이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곡은 Seoul Music이라고 하네. 그 다음은 Again, 다음은 Shinjuku Twilight, 다음은 I Will Wait For You, 다음은 Autumn Leaves, 이어서 I Concentrate On You, I Should Care... 나한텐 너무 낯익은 이름들이지만, 웃긴 건 사실 그렇게 많이 들어놓고도 누가 노래 틀어놓고 이 곡 제목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하나도 못 맞출 거라는 거야. 그런데도 그렇게 그냥 항상 들어. 그냥,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난 우선은 반드시 재즈를 들어야만 해. 재즈 중에서도 꼭 이런 쿨재즈를. 아, 가사가 있는 쪽도 있다. 노라 존스 언니. Shoot The Moon을 들으면 난 정말 어떤 순간에라도 마법처럼 차분해질 수가 있어. 심지어 이 곡은 재밌게도 날 따라다니면서 위로해주기까지 하더라고. 엄청 지치고 화도 나고 복잡한 심경을 잔뜩 끌어안고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 라디오에서 갑자기 이 곡이 흘러나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Shoot The Moon 다음으로는 Don't Know Why, Come Away With Me, New York City, What Am I To You? 같은 곡들이 있고. 분명히 평소에 더 많이 듣는 음악은 그냥 멜론 차트에 있는 곡들인데, 사실 그런 노래들은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듣는 게 다더라구. 참, 나 정말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니 노래들도 꼭 한 번씩 찾아들어. 노래 한 곡을 처음 듣고 시간이 지나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듣는다는 게 꽤나 쉽지 않은 일인데, 네 노래들은 최소한 나한테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 에너지가 필요할 땐 비타민 찾아먹듯 열아홉을 듣고, 알다시피 내 영원한 최애는 WAVE고, 어떨 것 같아나 헤어지기 위하여는 '헤일 노래'가 듣고 싶다 느낄 때면 대표곡 격으로 찾아듣게 되는 노래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앨범은 지금까지 거의 한 번도 각각의 곡들을 따로 들은 적이 없는 거 같아. 이 앨범 전체가 갖고 있는 무드는 꼭 통으로 느껴야만 하거든. 어때, 좋아하는 음악 물어볼 때 니 노래 말할 거라고 예상 좀 하셨나? 아무튼 전부 사실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얼른 신곡 내라구.


  민트초코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끝이 나는 네 글을 읽으면서 어찌나 안타깝던지. 난 흔히 말하는 '민초파'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음식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는 편이라. 내가 좋아하는 걸 얘기할 때 '먹는 것'은 결코 빼놓을 수가 없지. 굳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9년을 굳건히 내 핸드폰 잠금화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어초밥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런 대답을 할 때마다 다른 모든 음식들한테 미안해 죽겠어. 난 정말 세상의 모든 음식을 다 사랑한단 말이야. 그나마 나이 먹어가면서 아주 조금씩 취향이라는 게 생기고, 위염도 생기고 그러다 보니 못(안) 먹는 음식도 생기고 그랬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입에 들어가는 거면 뭐든지 다 맛있는 사람이었어. 왜 탕수육 찍먹파랑 부먹파가 탕수육 한 접시를 사이에 두고 일말의 타협 없이 팽팽하게 맞서곤 하는 순간이 중국집 가면 꼭 한 번씩 있잖아. 난 항상 중간에서 입맛만 다시면서 안타깝게 그 광경을 지켜보곤 했어. 둘 다 맛있는데, 왜들 저러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내가 유독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잘 알고들 있는 것들이 있긴 해. 위에서 말한 연어초밥이라든가, 마카롱이라든가. 근데 알지? 초밥은 무조건 토나리고, 마카롱은 무조건 자매공작소인 거. 내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밥집에서 일하고, 또 다른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마카롱을 만들어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 분당에 살아야 할 이유를 대라면 1번으로 이 두 음식점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 근데 최근에 강적이 하나 나타났는데, 판교에 있는 아이스 걸 크림 보이라는 젤라또 가게야. 여기 사장님이 얼마나 젤라또에 진심이냐면, 이탈리아에 있는 젤라또 대학교에서 젤라또 학과를 나오신 분이야. 이탈리아에는 젤라또 대학이 다 있더라구. 심지어 밤 열한 시까지 영업을 해서 정말이지 젤라또를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먹을 수가 있어. 이 가게의 핵심은 바로 눈물나게 푸짐한 인심인데, 맛보기 스푼을 무한정 제공해서 거의 그 날 매장에 나와있는 모든 맛을 다 먹어본 다음에 구매할 맛을 고르게 하시고, 젤라또를 주문하면 넘치게 담은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맛 젤라또 위에 덤으로 다른 맛 한 스쿱을 꽉 차게 더 얹어주신다니까. 젤라또 맛이 정말 독특하고 다양해서 이 가게는 한 번 가면 다른 맛들도 먹어보고 싶어서 자꾸자꾸 갈 수밖에 없어. 내 최애는 기네스 흑맥주 맛인데, 이거 아직 안 먹어본 사람이랑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아직 안 먹어봤으면 우선 다녀온 다음에 나한테 말 걸어줬으면 좋겠다. 자매품으로 소주맛도 있고 와인맛도 있단다. 그밖에 참외맛, 흑미맛, 바질맛 등 정말 기상천외한 젤라또들이 가득한데, 매일매일 라인업이 달라지니까 배민 어플을 통해 미리 체크하고 갈 것.


  근데 있잖아, 이 에세이 이렇게까지 편해져도 되는 거니? 오늘 글을 시작한 순간부터 정말이지 '노빠꾸'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필터링 없이 적어나가려니 글은 쭉쭉 써지는데, 이거 원 쓰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가볍잖아. 뭐 대단한 구독자 수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곳에 글을 올리는 거면 읽은 사람이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도록은 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글은 좋은 음악과 분당 맛집 리스트를 공유한 데 의의를 두는 걸로 하자. 나는 주로 감정과 인식을 다루는 글만을 쓰는 편인데, 감히 내가 정보를 다루는 글을 썼다니 이것도 뜻밖에 꽤 기쁜 일인 걸!


  그런 생각해본 적 있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모으면 그게 곧 나인 게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내가 싫어해서 피하는 것들이니까 그것들을 모으면 내가 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들은 나와 무관한 것들이니 내가 될 수 없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 곧 내가 가진 취향은 곧 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사실 다 공통점이 있다고 했지? 맞아, 그것들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야. 취향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단단하게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주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 그걸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가 취향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 아닐까. 그건 마치 '날 사랑해주세요, 날 사랑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면...' 하고 알려주는 설명서 같아.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 풍성하게 건축된 '나'라는 사람의 취향의 세계에 어떤 낯선 이가 발을 들이고, 그가 그 세계를 구경할 때 어떤 부분은 자신과 달라서, 어떤 부분은 자신과 같아서 관심을 가져주고 즐거워해준다면 그 세계의 주인은 아름다운 궁전의 정원을 가꾸어낸 정원사처럼 흐뭇하고 기분이 좋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이가 좋아해주는 것만으로 내가 사랑과 관심을 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 않아? 우린 거기서 만나는 거야. 상대방이 나에게로 오지 않아도, 내가 상대방에게로 가지 않아도, 내가 요 앞에 지어놓은 내 취향의 세계의 문고리만 잡아준다면, 상대방이 만들어놓은 그 사람의 취향의 나라의 입구만 두드린다면, 우리는 만날 수가 있는 거야. 그러니 이렇게 또, 이 나의 세계를 넌지시 물어보며 입장 티켓을 발권해준 너에게 나는 다시 한번 감동하고 고마워할 밖에. 자, 꼭 한 시간이 지났어. 난 우선 퇴장할 건데, 계속 찬찬히 둘러보다 가. 그럼 난 이만, 짙은 노래 들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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