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고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렇다 하게 잡히는 단어가 없어 독후감 쓰기를 미뤄오고 있었다.
영화든 책이든 뮤지컬이든 원래 감상한 직후에는 감상문 쓰기가 어렵다. 작품이 좋았을 경우, 대박! 말고는 보통 아무 말도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흥분이 약간 가라앉은 다음, 최소한 몇 시간이라도 지난 후에야 그 작품이 왜 좋았는지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작품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생각도 나름대로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가끔 이 작품처럼, 읽는 내내 너무 좋았고 심지어 뭐가 어떻게 좋은지까지 몇 차례 떠올렸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도 감상문을 못 쓰겠는 때가 있다. 작품의 탓인지 나의 탓인지를 생각하게 되지만, 그런 건 아무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질문이다.
아무튼 이 책이 참 좋다, 참 재밌었다, 작가가 참 대단하다, 같은 말 외에 이렇다 할 생각이 여전히 새하얗지만, 더 미루다가는 영원히 쓰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에 지금쯤 몇 마디 말이라도 적어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쓰다가 뭔가를 건지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대충 50명의 인물들의 이름으로 각각의 챕터가 구성되어 있다는 점부터 꽤 마음에 들기는 했다. 난 심지어 이 책이 단편소설집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단편 하나가 이렇게까지 짧아도 되나? 생각하고 읽기를 시작했었다.
그렇게 첫 몇 장을 넘긴 뒤 실은 책 전체가 모두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써있는데.. 바보) 기분 좋은 소름이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쳤던 거다.
사실 읽어본 적 없는 젊은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마주하면 경계부터 하게 된다. 아무래도.. 실망스러울 때가 잦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으나 가볍거나, 재미마저 없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간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지금, 살아있는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현재의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피프티 피플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 효자 같은 소설이었다. 책 마지막에 실려있는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은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노라고 밝힌다. 이 세상에서 반복되는 비극들과 그 모든 게 일어나는 사회라는 무대에는 원래 주인공이 없으니까.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사건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니까. 사실 그걸 실제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건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을 텐데, 이토록 정교하고 세심하게 해낸 작가가 참으로 대단하다.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 외에 또 한 가지 읽는 내내 놀라웠던 것은, 바로 셀 수 없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소설 속의 각 직업군들에 대한 전문성이었다. 이 부분을 위해서 세상의 어느 소설가가 철저한 사전조사와 인터뷰 없이 작품을 쓰겠냐만은, 이 책은 좀 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듯했고 그 노력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작중에 성격이 너무 좋고 매력적이어서 친구가 많고, 그만큼 누군가를 만날 약속도 너무 많아서 남자 친구를 괴롭게 하는 인물이 한 명 나오는데, 이이가 바로 정세랑이 아닌가 싶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만은 절대 쓸 수 없는, 정말 해당 직업군에 실제로 오랫동안 종사한 노련한 숙련자들과 깊은 인터뷰들을 수도 없이 많이 진행했으리라 확신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문장들. 이들을 다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믿기지가 않는다 정말, 하고 속으로 내내 감탄하며 읽어나갔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이런 생생함은 이 소설에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모두가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모든 인물이 저마다 살아 숨쉬고 있어야만 하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있진 않지만 나한테는 사업을 하는 고모부가 있고, 결혼을 앞둔 친척언니가 있고, 독신인 삼촌이 있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각자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라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구체적임.
소설은 사람이다. 사람이 결국은 소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참 잘 쓰였다. 한 명 한 명의 삶, 한 명 한 명의 이야기. 누군가는 주연이고 누군가는 조연이고 누군가는 엑스트라인 보통의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연극과는 달리, 각자의 삶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일 그 제각각의 삶들, 그것 자체를 주인공 삼은 소설.
인간은 세상을 혼자 살아가지 않고, 모든 행위는 인과관계의 복잡한 고리 안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시사하는 것은, 곧 그 자체로 윤리적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결과를 만들어내며, 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어떤 존재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음을 고려한다는 것이 바로 양보이며 선행이고 배려이며 희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윤리를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윤리를 주제 삼으며, 영웅이나 교훈이 등장하지 않아도 독자로 하여금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만든다.
자아는 언제나 타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로 인해 바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나 자신으로 인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이 진리를 내용과 형식을 통해 예술적으로 담아낸 이 책은 그래서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