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거리로 나가 '센닌바리(千人針)'를 완성해 오라고 했다. 면으로 만든 두툼한 허리띠에 길거리 행인 1,000명에게 한 개씩, 1,000개의 실매듭을 받아오라는 주문이었다. 이 허리띠 '센닌바리'는 전장의 일본군인들에게 위문품으로 보내는 것인데 매듭 하나하나에 천 명의 정성을 모은 띠를 허리에 두르면 날아드는 총알을 막아준다고 했다. 기원(祈願)을 담아 매듭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치맛단 꿰매며 바느질의 마무리 매듭짓는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심장함을 갖는다. 무려 천 명의 기(氣)와 소원을 담은 것이다. 강제 징용당했던 조선 청년들도 우리가 만든 센닌바리를 받아서 허리에 두르고 총알을 막아냈을까. 길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부탁하면 매듭 하나씩은 쉽게 지어주었다. 어린 학생들이 해달라고 할 때 거부하는 행인은 없었다. 숙제는 금방 마쳤고 어려운 숙제는 아니었다. 센닌바리는 일본어로 쓰라는 위문편지와 함께 전쟁터 어디론가 배달되어 갔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살짝 따로 불렀다. 교장 선생님께서 “공부도 시켜주고 국가를 위해 명예롭게 일하는 것으로 좋은 데 가는 건데 갈래? 정신대 가는 것인데"라고 물을 터인데 절대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정신대'라는 단어를 분명히 썼다. 이미 조선인 교장 선생님이 하게 될 질문은 학교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어서 다 알고 있던 공지 사항이었다. 그때 나는 국가를 위하는 길이고 공부도 좋은 데서 더 잘 시켜준다니 간다고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느닷없이 심각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여 혼란스러웠다. 좋은 제안을 선생님은 왜 비밀스럽게 거절하라고 하는지 의아했다. 부모님도 정확히 몰라서 조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지 전적으로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었다. 네, 또는 아니요 중에서 인생 최초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드디어 교장 선생님 앞에 섰을 때 ‘공부도 시켜주고 명예로운 일’이라는 말의 유혹을 단칼에 거부하기 어려웠지만, 담임 선생님을 믿고 ‘아니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가지 않겠다고 대답한 아이들을 강제로 가라며 강요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때 아무도 ‘정신대’라는 단어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의미를 포함하는지 전혀 몰랐다. 정보의 부재, 불통의 시대였고 옆 동네, 옆 도시, 지방 구석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속속들이 신속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어떤 아이들은 당당히 국가를 위해서나 개인의 전도양양한 앞길을 위해서 가겠다고 나섰다. 태어나면서부터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듣고 자랐고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매일 주입되었으니 교장 선생님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리고 광복되고 나서도 나는 그 아이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 땅 어딘가에 돌아와 살고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모든 아이들에게 안 가겠다고 답하라고도 할 수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도 싶다. 선생님의 그늘진 얼굴은 모든 뒷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잿빛 안개 낀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내기에는, 세상에 태어나 겨우 십삼 년밖에 살지 않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1940년대를 돌아보니 후미진 막다른 골목을 향해 내쳐 달리기만 하는 일제강점기 전시체제의 막바지로 모든 상황은 생각보다 무척 더 어려웠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도 나도 심히 어려운 시절을 버텨냈다. 물자는 태어나면서 부족했고 다들 힘든 상황이었다. 버리는 것 없이 절약하고 재사용했고 옷은 당연히 만들어 입으며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더도 덜도 아니고 ‘1940년대스럽게’ 살았다. 지금과 비교해서 좋고 나쁘고, 덜하고 더하고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 연탄도 나오기 전이고 누구나 아궁이에 장작을 때는 시대였으니 불만은 없었다. 모두 그렇게 살았으니까. 장작은 배달해주었고 배달이 온 후에는 장작을 패주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와서 불을 때기 좋게 잘라서 집 한쪽에 쌓아주고 갔다. 장작을 준비하고 불을 피우는 일은 북청 물장수에게 식수를 배달시키는 것처럼 온 가족의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일 중 하나였다. 허드렛물 외에 음용하는 물은 수돗물로 우리 집 근처에 있던 동네 공용 수도관에서 북청 물장수가 지고 왔다. 시인 김동환이 쓴 바로 그 ‘북청 물장수’가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툇마루에 앉아 식사를 마친 북청 물장수가 일어나면 소반의 찬그릇에 남은 음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함경도에서 왔다는 그들은 말을 아끼고 과묵했다. 누군가가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봐 그런다고도 했다. 전적으로 물, 불, 식량을 마련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심하게 곤궁한 삶은 어른들의 차지였고 집안 어른들은 입 밖으로 크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어찌했든 삶을 꾸려가던 어른들이 갖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생각도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조금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세대의 힘겨운 삶을 고려하며 뒤를 보고 살 정도로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나는 앞길을 헤쳐나가야 했다. 몇 명 아이들은 떠났고 가지 않고 남은 아이들은 빈 책상을 두고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