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 4학년이 되자 선생님 눈에 달리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육상 선수로 뽑혔다. 하얀 줄을 운동장에 그려놓았는데 그 줄을 따라 뛰라고 해서 냅다 달렸다. 스타트에는 어떤 포즈를 취하고 어떻게 달리는 건지도 몰랐고, 운동을 해보라거나 연습을 시킨 것도 아닌데 잘 달려서 1등을 했다. 학교 운동회에 나가서 뛰라고 해서 또 뛰었더니 또 1등을 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엔 릴레이 경기에 참여시켰다. 나중엔 ‘원정경기’까지 가곤 했다. 영천에 있던 서울여상 체육대회에 초대받아 달리기 시합에 나가게 된 것이다.
흰색 팀, 빨간색 팀으로 편을 나누어 일본말로 ‘하찌마끼’라고 불렀던 흰색, 빨간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열심히 뛰고 목이 터져라, 쉬어라 힘차게 응원했다. 우리 팀이 이겨야 했다. 이기면 흥이 돋았고 가슴이 뻥 뚫렸다. 꼬맹이 적에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기를 잘 한 덕에 기초 체력이 다져졌나 보다.
소학교, 중학교에서 실내 학습 이외에, 단단하게 기초 체력을 갖추는 것이 일제의 교육 방침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체력단련을 목적으로 소풍, 혹은 멀리는 원족(遠足), 좀더 힘들게 산행하는 강보회(强步會)를 가는 단체 활동을 자주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운 시절인데도 등에 배낭을 지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단체로 먼 거리를 걸어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아름다운 환경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신발 밑창이 요즘처럼 두껍고 기술적으로 잘 만든 것이 아니라 변변치 않은 수준이었지만 먼 거리를 걸어 다녔어도 요새 흔히 듣는 ‘족저근막염’이란 병명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걸리지도 않았다. 아무튼 멀리 소풍을 가는 것을 원족이라고 불렀는데 가까운 거리는 전차 타고 내려서 걸어가거나, 먼 거리는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처음 다녔던 동네 중학교에서는 관악산부터 금강산까지, 그리고 곧 전학 간 <이화여자중학교>에서는 개성, 설악산,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소학교, 즉 초등학교 시절에는 서울 북쪽 자하문 밖의 세검정까지 원족을 갔던 기억이 난다. 효자동 근처까지 전차를 타고 갔고 자하문을 지나 세검정까지는 걸었다. 거기에는 능금 밭, 자두 밭이 많았다. 지금도 북악산 계곡에 능금 밭이 조그마하게 남아있어 능금 마을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이 푸대 자루를 들고 가 능금이나 자두를 사고 자루 입구를 말아 한쪽 어깨에 메고 오기도 했다. 그때는 하얀 개울물이 중간 크기의 바위 위로 포말을 일으키며 콸콸 흘러내렸는데 지금은 비가 오지 않으면 실처럼 물이 흘러 거대하고 평평한, 넓게 퍼진 바위가 더욱 잘 드러나 보인다. 세검정의 정자는 소학교 시절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므로 봤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 세검정을 지나가면 개천가에 우뚝 서서 반짝반짝 빛나는 새 정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겸재 정선의〈세검정도〉에 그려진 정자를 보고 1977년에 새로 지었다고 했다. 늘 이곳을 지날 때마다 소학교 때 창신동에서부터 세검정까지 힘든지도 모른 채 조잘대면서 힘차게 걸어오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그때의 기억 속 이미지는 서서히 희미해져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페이드 아웃’되고 있다.
1940년대는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고 불렀다)이 끝을 향해 달리던 때라 모두 힘들게 살았다. 지금 되돌아보니 어느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쟁의 끝이 언제 올 것임을 아무도 몰랐다. 막바지의 전시체제 하에서였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훨씬 더 어려웠다는 것도 후에 나이 들어 어른이 된 뒤에 전체를 들여다보고서야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알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이랑 뛰어노는 데 열중했던 어린 시절이니 뭘 알았겠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고 배워나갔다. 공부하라면 열심히 공부하고, 달리라면 전력 질주하여 1등으로 달리고,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일본어로 위문편지를 보내라고 하면 글을 쓰는 고학년 학생들은 또박또박 편지를 썼다. 태평양전쟁이 언제 끝날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어른들은 짐작하고 있었을까? 전쟁은 끝날 것이고 그 다음 수순이 어찌 전개되어 갈지 알았을까?
서울의 집들도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덥히고 밥을 해 먹던 시대였다.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장작불을 지피는 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심하게 곤궁한 삶은 묵묵한 어른들 차지였을 것이다. 모두 삶은 힘든 것이라고 감내하며 살았다. 우산도 되고 가림막도 되어주었던 부모님들, 그 부모님들의 보호 아래서 우리가 운동장 하얀 줄을 따라 미래를 향해 달음박질을 하고 있을 때,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또 다른 어떤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우리는 있었다. 여울목을 가로막고 선 바위들을 거세게 밀치며 이리저리로 솟구치며 흩어져 내려가는 물살처럼 격변하는 순간순간에 우리는 서있었다. 새로이 도래할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변화는 솔바람처럼도 격랑처럼도 일었다. 일엽편주에 내맡긴 삶과 같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버티며 열심히 힘주어 노를 저어야 했다. 거센 바람이 불어대는 속에서도 삶을 해쳐 나가는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어렸던 우리는 그저 달리라니 달렸다.
어릴 때 그렇게 매일 달리고 또 달리던 큼지막했던 창신 소학교 운동장을 최근에 가보니까 건물을 자꾸 지어서인지 운동장이 작아졌다. 나이가 들어서 작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 바퀴씩 넓고 큼지막한 선을 그리며 달리던 육상 코스가 있는데 눈대중으로 측정해봐도 그 코스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운동장이 작아져서 참 아쉽다. 전력질주를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 아이들은 뛰어놀면서 자라고 이만큼 나이들 때까지 지탱해줄 체력을 키우는 건데 어디서 뛰어노는지 걱정스럽다. 나의 평생 경험은 어릴 때부터 다져진 체력이 인생을 끌고 가는 기본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