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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Aug 31. 2019

My Story  – 엄마와 오이지

글쓴이가 회상하는 '엄마'


엄마는 토요일에도 일했다. 출장도 많았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없었고 일 봐주는 언니가 항상 맞아주었다. 언니는 나를 살뜰히 보살펴주어 큰 부족함은 없었으나 엄마의 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린 날 엄마와 겸상을 했던 횟수는 얼마나 될까. 다른 형제들 없이 나하고만 겸상을 할 가능성은 가뭄에 돋은 콩나물 서너 가닥 정도의 확률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을 걷느라 콧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던 어느 여름날 무심히 문을 여니 엄마가 있었다. "엄마!"라고 외마디를 지르게 되는 그 예상치 않은 황홀한 반전을 아는지.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시각에 그늘진 집안은 서늘한 기운으로 맞아주었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한결 시원한 날로 기억한다. 기억은 반드시 실제 상황 그대로를 묘사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자의 감정에 따라, 누구와 함께 했는가에 따라, 가시밭길도 꽃길처럼 아름답게, 추운 날이 따스한 날로 새겨지기도 한다. 엄마와 나, 단둘이 겸상을 하게 된 그날, 나는 신바람났고 그 바람에 더 시원했다고 기억할 수도 있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한여름 날이 객관적으로 시원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날이 무척이나 더웠으므로 엄마는 동글납작하게 썬 오이지에 송송 썬 실파를 동동 띄우고 식초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약간의 고춧가루를 솔솔 뿌린 찬을 준비했다. 다른 반찬은 기억나지 않는다. 있었다고 해도 편식 대장이었던 나는 다른 찬은 안 먹었을 것이다. 소반에 흰밥과 오이지를 담은 보시기만 있었던 것처럼 딱 두 가지만 클로즈업되어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밥 한술을 뜨면 엄마가 오이지 하나를 얹어주었다. 오이지 국물은 그냥 새콤한 물이었다. 오이지만 건져 먹는데 어찌나 맛나고 시원하던지 먹으면서도 등골로 시원한 바람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찬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고기도 달걀도 소시지도 아닌 바로 그 여름날의 시원한 오이지이다.

옛 소반 위 오이지 한 보시기.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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