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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Aug 31. 2019

Her Story - 짹짹짹 참새들의 학교

1937년에 창신동의 <창신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 해는 중일전쟁과 난징학살 사건이 일어난 해였지만 서울 한 구석의 우리 집에서, 그리고 특히 여덟 살짜리인 내게는 이런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 채 어제와 같고 내일과 같을 오늘의 일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통학교는 지금의 6년제 초등학교 과정으로 창신 학원보다 훨씬 멀어서 부지런히 걸어 다녀야 했다. 이듬해 일본의 학교명을 따라 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 불리게 되어 <경성 창신 공립 심상소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내게 오랫동안 입에 익은 이름은 <창신 소학교>였다. 부침이 심했던 시대라 학제도 명칭도 자주 바뀌었던 듯하다. 2016년 개교한 지 100년이 된 창신 소학교 출신으로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물인 배우 문희, 남궁원, 윤여정, 가수 이장희, 박학기, 배호와 정선용 유도 선수가 나의 후배들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해, 유치원에서 1년간 활보했던 공간보다 무척 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환경에 눈을 떴다. 둥글고 큰 흰 운동장은 나를 포함한 육상 선수 네 명이 큼지막한 원을 그리며 이어달리기를 할 정도로 컸다. 이 운동장에 비하면 창신 학원의 운동장은 손바닥만 했다. 소학교 운동장에는 훨씬 많은 아이들이 와글와글 그득했다. 1학년 우리 반에는 시기를 놓쳐서 들어온 나이 든 아이들이 많아서 나는 반장은 하지 못했다. 덩치도 컸던 그 아이들이 학급 일을 죄다 도맡아 했다. 나서서 반장을 하겠다든가 앞장서서 뭔가를 하겠다고 손들고 나설 생각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꼬맹이로 그저 뭘 배우니까 따라가고 혼자 저절로 신났을 뿐이다. 학교에 가면 귀도 크게 열고 눈도 반짝반짝 떴다.

유치원 1년, 소학교 6년 동안 일본어가 국어였고 음악 시간에도 일본 동요만 배웠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일본어보다는 조선어로 가르쳤다. 글을 읽고 쓸 때가 아니어서도 그랬겠지만 강압적 분위기에서 강조하며 배운 기억은 없다. 그러면 그때 뭘 배웠느냐고? "어제 일도 생각나지 않는데 팔십몇 년 전에 뭘 배웠는지 어떻게 기억하겠니?"라며 기억해내는 것조차 포기하려고 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 옛날 따라 부르며 배운 노래가 기억 창고 어디에 박혀 있기는 했는지 어린 시절을 기억을 끄집어 내려니 갑자기 입에서 맴돌다 몇 소절이 스르륵 튀어나온다. '찌찌뽀뽀 찌뽀뽀 스스메노 각꼬노…'라는 동요는 무슨 말인가 하면 '짹짹짹 참새들의 학교 선생님은 회초리를 짹짹짹 흔든다'라는 노랫말이다. 유치원 때 배운 노래이다. 소학교 음악 선생님은 '고꼬난 센세이'라고 불렸던 조선인 고금난 선생님인데 풍금으로 반주하고 동요를 가르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고 나는 열심히 따라 불렀다. 들리고 보이는 게 다 새롭고 재미났다. 투명한 어떤 문이 눈앞에서 활짝 열린 듯했다. 1학년에 들어가 처음 배운 노래가 '뽀뽀뽀 하도 뽀뽀 마메가 호시이까...', 우리말로 하면 '뽀뽀뽀 비둘기 뽀뽀 콩이 필요하냐, 그러면 주지, 전부 다 나와라. 사이 좋게 먹자' 이런 내용이다. '유끼야 꽁꽁 아라래야 꽁꽁...‘은 '눈이 꽁꽁 우박이 꽁꽁, 와도 와도 그치지 않는다', 이런 동요도 배웠다. 80여 년 만에 다시 불러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흥이 난다. 

시작한 김에 더욱 매끄럽게 노랫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이 동요들을 불러봤다. 완벽해질 때까지. 이런 자세는 평생 나의 성격으로 굳어진 것이다. 재미나고 귀여운 노랫말의 동요만 배운 것은 아니다. 1940년 즈음, 고학년에 올라가니 학교에서 군가를 가르쳤다. "갓데구르소또 이사마싯구 짓까데 구니오 데데까리와 " 노래의 의미는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아주 용감하게 맹세하면서 국가를 나선  ", 그리고 나머지 소절은 일본어 노랫말은 기억이 안 나는데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께서 죽어서 돌아오라고 부추겼는데 눈꺼풀에 떠오르는 깃발의 물결 진군하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마다…"라는 내용이었다.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해였으니 만큼 일본은 더욱 전의를 불태우고 기세를 몰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반인들까지 철저히 정신 무장시키려 했던 듯하다. 총 14절이나 되는 긴 군가인데 우리는 첫 한두 절만 배웠다.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은 아마도 전장에서 일본 청년 군인들과 함께 끝까지 외워 불렀을 것 같다. 지금 노래를 읊으며 가사의 내용을 생각하니 소름이 다 돋는다. 

이 동요들을 판도라 상자에 가둔 듯 광복을 맞은 날부터 오늘까지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창작동요들이 1930~1940년대에 활기차게 만들어지던 시대인 일제강점기에 자라면서 우리나라 동요를 듣거나 학교에서 배우고 불러보지 못했다.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옛날 사람인 나의 어머니는 새 동요를 접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거나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이들을 키우고 재우지 않았다. 잠들 때는 그냥 누우면 자는 거였다. 토닥이며 동화를 읽어주는 것은 한참 자란 뒤 서양 영화에서 보게 되었다. 광복을 맞고 성인이 된 후 누가 가르친 것도 특별히 배운 것도 아닌데 어찌저찌 들은풍월로 자연스레 우리 동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배우지도 않은 동요를 부를 수 있다는 게 희한하지 않은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우리 것’이라서 그랬나 싶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것처럼 귀에 익었다. 나는 후에 직장생활을 할 때 업무처리를 할 정도로 일본어를 구사했지만 나의 자식들에게 일본 동요를 가르치거나 불러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동요나 번안 서양 자장가는 나의 아이들이 어릴 때 참 많이 불러주었다. 아이들과 빠른 템포로도 불렀다 느리게도 불렀다가 율동을 하면서도 부르고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렸다. 특히 아이가 열나고 아플 때 안거나 업고 둥개 둥개 토닥이면서 여러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직장에서 늦게 돌아와 아픈 막둥이를 안고 업고 자장가를 부르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고 졸기 일쑤였고 아이는 어느새 품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때 불렀던 자장가를 지금 해보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잘 자라 우리 아가~ 해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로 시작해서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이런 자장가가 금세 입에 오른다. 노래 부르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어릴 때 불렀던 일본 노래들과 우리 노래들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고 중간 몇 마디는 잊어서 아무리 반복해 불러보아도 며칠 동안 그 빈 마디가 채워지지 않는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고 이웃집 친구에게 노래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책을 한 장씩 넘기며 불러보니 다 아는 노래였다. 무척 반가워 노래책을 돌려주기 전까지 며칠간 윤극영, 이흥렬 작곡가, 윤석중, 이은상 작사가들의 노래를 실컷 불렀다. 정확하지 않았던 소절까지 완벽하게 가사를 맞추어 불렀다. 다시 소학교 1학년생이 된 기분이 든다. 이것이 동요의 힘인지 맑고 밝아진다. 마지막 장을 부르고 노래책을 덮었다. 어린아이 같은 환한 미소가 얼굴에 맴돈다. 연이어 나의 자식들 넷과 함께 불렀던 노래들이 줄줄이 생각난다. 설날, 반달, 오빠 생각, 고드름, 할미꽃, 달마중, 꽃동산, 산바람 강바람, 산토끼, 어린 음악대, 햇볕은 쨍쨍, 봉선화,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 참 좋은 노래들이다.

지금 살고 있는 실버타운에서도 학교에서처럼 다양한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가요, 가곡 클래스이다. 일 년에 두어 차례 타운 내에서 발표회도 갖는다. 발표회는 어린 학생들의 학예회 수준이다. 초등학생들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의젓하게 학예회 무대에 서는 것처럼 우리 주민들끼리 벌이는 행사라고 해도 프로 성악가 못지않게 멋진 드레스를 하루 빌려 차려입고 무대에 오른다. 이날을 위해 우리 노래 팀원들은 보충수업도 과외수업도 받으며 열심히 준비한다. 무대에서 참새, 꾀꼬리처럼 노래를 부른다.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 짹짹짹 노래했던 유치원생 때나 즐겁게 노래하는 데는 큰 차이가 없다. 자식들이 뭘 그리 대단하게 차리고 무대에 올라 나이 들어 불안정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는데 지금까지 못해 본 것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메마른 모래처럼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짜임새 있게 꾸준히 뭔가를 하는 자세는 ‘자기 앞의 생’을 대하는 사람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활동도 인생 경험 중 하나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조금 해봤지만 특별히 배운 적은 없었다. 주민들을 관객으로 앉혀 놓고 일주일에 한두 차례씩 배우고 연습한 곡목을 한차례 발표하면 괜히 뿌듯해진다. 이 나이에 일 년 어젠다를 채울 만큼 거창한 대외적 활동 계획은 없지만 올해의 잔잔한 개인적인 계획들 중 하나의 매듭을 짓고 삶을 살지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1937년, 소학교(초등학교) 입학, 단체로 남산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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