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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Aug 31. 2019

Her Story - 흰 사발의 온기


마냥 뛰어노는 게 좋았던 어린 시절, 집과 학교, 그리고 친구들이 사는 동네 골목길을 활동 무대로 철없던 ‘어린이 시대’를 황홀하게 보냈다. 요새처럼 놀거리가 많은 시대도 아니었고 삶은 무척 단순했다. 나는 어린이 신문이나 동화책, 만화책을 보고 자라지 못했다. TV는커녕 읽을 책도 제대로 없었고, 어른들이 라디오에 귀를 붙여 듣던 시대의 어린아이가 뭐 특별히 할 게 있을까.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뛰어다니며 바쁘게 노는 것이 ‘주 업무’였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나는 노는 게 좋았어”라고 지금도 말할 정도로 막 뛰어놀고 또 놀았다. 고무줄놀이도 신나게 잘했고 일본어로 ‘나와토비’라고 불렀던 줄넘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심장이 터지게 열심히 뛰었다. 잘 놀라고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조약돌이 부족하면 기왓장을 깨고 다듬어 공깃돌을 많이 만들었다. 땅바닥에 주르륵 알을 깔아 놓고 모둠 공기를 했다. 밖에서는 기왓장 공깃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고 집안에서는 ‘닥공기’를 하고 놀았다. 닥공기는 천주머니에 굵은 모래나 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당시에는 일본어로 '오자미'로 불렀다. 만두만 한 닥공기 주머니를 손등에 네댓 개씩 올리면서 야무지게 공기놀이를 잘도 했다. 편을 두 패로 가르고 하는 공기놀이는 그야말로 프로 선수 수준으로 잘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가을 운동회 때마다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운동장 한가운데 메달아 놓은 거대한 박을 팥주머니로 터트리는 순서를 매년 준비했다. 아이들과 함께 학부모도 들어가 팥 주머니를 던지라고 했던 적도 있다. 오색 종이와 종이 리본이 날리고 문구가 적힌 깃발이 툭 떨어지도록 박을 먼저 깨는 팀이 이기는 것이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에 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주머니를 던졌었다. 나의 아이들은 파랗고 하얀 모자를 쓰거나 청백의 머리띠를 두르고 뛰었다. 나는 해방이 되기 전까지 백홍 팀으로 나뉘어 시합에 임하고 응원을 했었다. 청백의 머리띠를 두르지 못했던 시대에 살았었다.

친구들과 놀이를 하면서 온 동네를 쏘다녔으므로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해질녘까지 '야도 잡기'를 하느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일본 말로 '야도'는 ‘집'이라는 뜻인데 한 명의 술래에게 잡히지 않도록 막 뛰어가서 '집(야도)'으로 정한 곳을 먼저 탁 치면 이기는 놀이이다. 소학교에 들어가면서 남학생과 여학생은 서로 다른 반에서 공부를 했지만 동네에서 ‘야도 잡기'만큼은 남자아이들 하고도 무리를 지어 다 함께 했다. 한창 놀이에 집중하다 보면 기우는 해가 숨을까 말까 뉘엿거리는 저녁때가 왔다. "밥 먹어라"라고 어머니가 골목을 향해 크게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같았다. 그 소리에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막 달려 들어갔다. 나의 신나는 하루가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얼굴과 다리를 씻으면 동네 골목길을 휘젓고 다니며 묻힌 땟국물이 흘렀다. 물 냄새를 풍기고 앉으면 어머니가 놋주발과 반찬 접시를 나무 소반에 올려 방에 들여왔다. 찬기에도 뚜껑이 덮여 있었다. 어머니는 뜨겁지 않은 듯 주발 뚜껑을 척 열었지만 동생과 나는 세상에 이보다 뜨거운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놋주발 뚜껑을 후다닥 열어젖히고 귓불에 손을 갖다 댔다. 식구들의 주발과 사발에는 제 짝의 뚜껑을 덮어서 소반에 올렸고 식사는 뚜껑을 여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런 단순한 행위는 놀이터에서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경건하게 식사에 임하는 작은 의식 같았다. 겸상하는 어른들은 조금 어려웠고 우리는 얌전한 자세로 식사를 했다. 신나게 뛰어놀았으니 밥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특히 겨울에 장작불을 때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앉아 따스한 밥을 먹으면 행복감이 몰려왔다. 늦게 오는 식구는 이불을 덮어서 방바닥에 묻어둔 따끈한 주발을 꺼내서 먹었다. 그런 식구는 주로 아버지 한 분이었다. 여름에는 사발에 담아 한눈에도 시원하게 보였고 매끄러운 사발을 감싸는 왼손바닥으로 밥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머니의 따스함이다. 울타리 안에서 만끽하는 평화롭고 안락한 날들의 온기였다. 

1940년대 초,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도시락을 싸갔다. 요새 찬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시금치, 가지나물, 멸치볶음, 콩자반, 장아찌 무침, 우엉, 감자조림 그런 거였다.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었고 그 맛대로 나의 자식들에게도 그런 반찬을 해주었다. 서울식이라 간이 너무 세지도 않고 젓국이 지나치게 들어가지도 않게 만든 슴슴한 찬의 맛은 저절로 대를 이어갔다.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내야지 하고 특별히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봐왔고 먹어왔으니 그런대로 따라서 해나갔다. 어린 나는 뭐든 잘 먹었고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평소에는 나물, 김치가 올라오는 보통 반찬을, 어쩌다 한 번씩은 장조림이랑 달걀 찬을 도시락에 싸주었다. 어머니는 푸줏간, 고깃간이라고 불렸던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사왔다. 그런데 그건 어쩌다 맞이하는 일이었다. 풍족함은 매일 마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절이 되면 떡국 한 그릇과 약식, 빈대떡, 고기전, 오색 산적을 준비했다. 때와 절기를 구분했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소박하게나마 시절에 따라 마련했다. 365일 중 명절날이 특별하고 색달라서 기다려지는 이유였다. 매일이 특별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손꼽아 기다리고 설레는 날도 있고 부족했다가도 풍족한 날도 있고 해야 신나게 사는 맛이 난다. 

아이들을 위한 간식이 따로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조르지도 않았고 간식을 모르고 살았다. 간혹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신나게 놀다 오면 고구마나 감자를 쪄주기도 했다. 소학교 시절 어느 날부터 가게에서 ‘눈깔사탕’을 팔기 시작했다. 집 앞 길거리에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우리보다 훨씬 어른스럽던 언니와 달리 동네를 탐험해 나가던 나와 어린 동생은   그곳에서 이 신상품을 탐했다. "눈깔사탕 주세요"라고 말하고 달콤함을 손에 쥐는 행복을 맛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신기하고 달콤했는지 사탕을 빨아먹을 때의 행복감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나의 자식들이 어릴 때의 간식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식들을 떠올리며 태극당이나 고려당 봉투, 케이크 파라의 도넛 상자를 들고 왔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링' 사탕은 아이들에게 몇 알씩 배급을 주었다. 달콤한 팥이 들어간 튀긴 도넛은 식구 수대로 사 와서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웠다. 더 먹고 싶었을 텐데 욕심에 심통을 부리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장 속 높이 올려놓은 사탕을 자린고비가 말린 북어 쳐다보듯 목을 젖혀가며 쳐다보았을 뿐이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친척 어른 댁을 방문하면 나의 아이들은 눈깔사탕보다 컸던 ‘왕 드롭스’와 과자, 캐러멜 등이 한꺼번에 든 ‘종합 선물세트’를 한가득 받곤 했다. 왕 드롭스는 가게에 쪼르르 달려나가 사 먹는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 그날만 받는 것이었다. 봉투는 유난히 컸고 일 년을 버티기에 충분했다. 겨울에 퇴근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화로 위에서 말린 귤껍질을 우려내는 주전자가 설설 끓고 있었고 집안 공기는 후끈했다. 그 향기와 온기와 아이들이 맞는 명랑한 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사라졌다. 그때 마시던 뜨끈한 귤차는 어찌나 달콤하고 맛났던지. 지금 다시 마시면 입맛이 변해서 짐짐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1960~1970년대, 우리 아이들 네 명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앙증맞게 자그마한 주발을 사용했다. 나의 어린 시절처럼 뚜껑이 있는 주발이었다. 화사하니 매끄럽고, 밑굽이 좁은 일본식 공기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대여섯 살 된 막둥이가 반찬으로 손을 뻗다가 팔뚝으로 톡 치기만 해도 공기가 떨어져 깨지기 일쑤였다. 깨진 조각들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뽀얗게 하얀 밥이 방바닥에 적나라하게 흩어졌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겁을 먹었다. 나는 그릇을 깨뜨렸다고 혼낸 적은 없다. 밥과 깨진 그릇을 치우고는 다시 퍼주었다. 제일 꼬맹이에게는 뚜껑과 몸통이 납작하여 툭 쳐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 주발을 새로 사주었다. 놋주발도 사용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서서히 설거지와 관리가 편리한 스테인리스 스틸 주발로 대체하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처럼 아이들도 뚜껑을 여는 ‘의식’을 거치고 식사를 했고, 하나 더해 크리스천인 남편 집안의 가풍을 따라 매끼 식사마다 모두 감사 기도를 했다. 아이들은 남편의 기나긴 기도가 언제 끝나나 실눈을 뜨고 엿보곤 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쉰여덟의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가 차려주던 소반 위 밥, 탕, 찬들이 기억 속에서 아른거리면 아직도 어머니의 온기가 느껴진다. 흰 사발을 쥔 손바닥에 따스하게 스미는 어머니의 그 부드러운 온기 말이다.

1940년대, 6년제 중학교 시절, 운동장 바닥에서 공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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