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성큼 자란 느낌이었다. 새로운 뭔가를 하고픈 마음이 부풀어 가슴뼈가 뻐근해짐을 느꼈고 뭔지 모를 기대감이 풍선처럼 자랐다. 머리 모양새, 옷, 공부, 환경,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동그란 안경을 쓰니 똘똘한 문학도나 된 듯 보였다. 지난 6년 내내 거의 입고 다니던, 무릎 아래로 오는 짧은 치마저고리를 완전히 벗었다. 서양식 옷을 주로 입거나 교복을 입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단발머리, 눈썹 위에서 일직선으로 앞머리를 잘라 이마를 가리고 옆머리, 뒷머리는 귓불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타일로 짧게 잘랐다. 작가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머리를 깎았던 시골 마을에서의 첫날을 상세히 묘사한다. 서울에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런 머리 모양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낯설지 않았고 긴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해서 충격은 아니었다. 성장하는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일본말로 '오가빠'라고 불렀는데 머리를 길게 땋고 댕기를 매지 않아 간편했다. 남자 어른들이 상투를 잘리게 된 것처럼 여자들의 머리 모양새를 어찌하라고 강압적인 지시가 내려오지는 않은 듯하다. 나의 어머니는 여전히 반듯하게 쪽을 진 머리를 고수했다. 나는 특별히 기억에 남지도 않은 어느 날, 아침 등교 전에 긴 머리를 빗기고 땋는 것도 일이었으므로 머리를 싹둑 잘랐다.
소학교 고학년부터 활동이 많아지자 어머니는 고무신 말고 발등에 흰 줄이 두어 개 있는 검은색 운동화나 끈을 매는 흰 운동화를 사주었고 중학교 때도 여전히 이런 신발을 신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학생 생활에 설레었다.
나는 동네 가까이에 있는 조선 여학교에 들어갔다. 고종 사촌인 정희와 함께 입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반장이 되었다. 시험을 잘 봤는지 어쨌는지 첫날, 선생님이 "박정숙"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더니 반장을 하라고 했다. 나는 소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조금씩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과 학교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고 배운다는 사실에 여전히 들떠 있었다.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주 멀리 있었다. 일본 아이들, 일본 사람들은 다른 구역에 살고 있어서 우리 동네 근처에서는 거리를 걸어가는 일본인을 조금 마주칠 뿐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본인들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밝은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아이 같았다. 유년기에 동네방네 뛰어놀던 에너지를 중학생이 되자 학교생활에 모두 투입하며 열성적이고 모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모범생 중 하나였을 텐데 모범생이란 단어도 나는 무척 마음에 든다. 그런 기질은 천성인지 90이 넘은 지금도 실버타운의 친한 주민들은 나를 ‘범생이’라고 부르는데 듣기에 거북하거나 싫지 않다. 시내를 지나가다가도 뭔가를 찾아 헤매는듯한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나 일본어로 “도와줄까?” 하고 말을 먼저 건넨다. 할머니가 다가가니 경계심을 풀고 의지하는 외국인들은 긁지 못했던 등 한가운데를 긁어준 듯 환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한다. 헤어지고 돌아서면 오늘 착한 일 하나 한 듯하여 나도 기분이 참 좋다.
내가 꼭 애국자라서가 아니라, 범생이라서 그런지 요즈음에 자꾸 나라 걱정이 된다. 교양과 규범 없이 살아도 되는 세상이 된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육 관계자는 아이들에게 대체 뭘 가르치는지 의구심이 인다. 아이들의 인권도 좋지만 인권만 중시하고 규칙, 규율이란 것도 없이 "아이들 맘대로! 꼭 그래야만 하나" 싶다. 생을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인지 배우지도 않고 영글지도 않았는데 뭐든지 애들 맘대로 하라는 건지 도무지 요즘 젊은 리더들을 이해할 수 없다.
TV 퀴즈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을 빠지지 않고 본다. 그 프로그램에 어린 고등학생들이 얼굴은 하얗게,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나선 모습이 하나도 이뻐 보이질 않는다. 천하게 보이고 못되게 보일 뿐이다. 밖에 나가보면 머리는 보라색, 분홍색으로 하고, 바지인지 윗도리인지 구분할 수 없이 입은 것을 보면 ‘아이구 저걸 어째’란 말이 툭툭 튀어나오고 속이 상한다. 진심으로 “ '너 그거 안 좋게 보이니?' ” 그 말을 하고 싶은데...”, "네가 너를 모르니?" 하며 붙잡고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데 뾰족한 수가 없다. 어떤 때는 도무지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길거리나 버스에서 상스런 말을 입에 담거나 침을 탁탁 뱉는 어리고 젊은 아이들을 보면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손 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짧고 따끔하게 지적을 하고는 후다닥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내 갈 길을 간다.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야단은 쳤지만 어린아이들이 무서워서 서둘러 달아나고 마는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중2 학년생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아이들이고 엉덩이에 뿔난 젊은이가 고깝게 듣고 행패를 부릴까 봐 두려워 얼른 피하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따끔하게 말했다고 하지만 듣는 아이들이 따끔하게 찔렸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자식들이 거리에서 큰일 당하게 왜 그러냐고 하지만 ‘범생이’ 출신인 이 호호 할머니는 영국 드라마의 ‘미스 마플’처럼 다 보고 다 듣고 있어 원칙과 규범을 벗어나는 망아지들에게는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들을 어떻게 저렇게 만들어가나,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변해갈까.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까. 한심스럽고, 답답하다. 왜 저렇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는지, 옛날엔 훨씬 힘들었지만 그걸 극복하고 다 해왔는데 왜 도전하고 뚫고 나가며 살려고 하지 않으려는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50년대에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다. 그때가 오히려 희망에 차 있었다. 앞으로 더 잘되겠지, 차츰차츰 나아질 것이라는 빛을 보고 살아갔다. 그러나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지금은 왜 절망이 더 많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젊은이들의 이상야릇한 모습들, 좋은 말, 바른 행동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 절망이 눈앞에 서린다. 울적울적 화가 북받치는데 그럴 때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비단 범생이가 아니라도 어려운 시기를 먼저 겪어냈고 살아냈던 나이 든 세대는 미래 세대 걱정을 한다. 우린 얼마 안 남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찌 될지 참으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