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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Her Story - 걷고, 달리고, 던지고, 그리고

얼마 후에 '정신대'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라고 귀띔해준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정동에 있는 <이화여자중학교>로 가라며 서둘러 서류를 갖추어 전학을 진행해주었다. 선생님 말씀을 따라 나는 한 동네에 살던 고종사촌 정희를 포함하여 서너 명의 친구들과 이화여자중학교로 전학했다. 늘씬하게 키가 컸던 같은 나이의 사촌 정희는 놀이 동무이기도 했고 내가 하는 것은 늘 함께 하는 친구였다. 선생님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이었는데 나를 이화여자중학교에 보냄으로써, 이후 내가 연희대학교까지 가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밝은 빛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화여자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제는 4년제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이 된 후 몇 달이 지나자 지금의 중고등학교 6년 과정과 같은 6년 제로 바뀌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6년간 배우는데 학교명은 <이화 고등여학교>에서 <이화여자중학교>로 바뀌었다. 이화여자중학교에 가니 또 다른 세상, 훨씬 더 넓은 울타리의 세상이 펼쳐졌다. 나는 학교생활의 재미에 다시금 푹 빠졌다. 뭐든 하라고 하면 전적으로 선생님들의 말씀을 따랐고 일단 시작하기로 한 활동은 최선을 다해 끝까지 적극적으로 임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단계를 벗어나 나도 전차를 타고 등교하는 중학생 ‘큰언니’가 되었다. 정동의 이화여자중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동대문까지 걸어 나가 전차를 타야 했다. 정거장에는 항상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겹의 긴 꼬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나처럼 어린 여자아이들은 전차를 타기 위한 ‘전력투구, 각개전투’의 장에서 뒤로, 옆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전차를 기다리다 앞에 몇 사람을 남기고 끊기면 또 마냥 기다려야 했다. 지금 거듭 생각해봐도 갑갑한 마음에 속이 다 타고 한숨이 나온다. 전차를 타고 광화문에 내려 정동 쪽 언덕을 향해서 오토바이 달리듯 잰걸음으로 걸었다. 전차도 버스도 자주 배차되는 시대도 아니었고 걸어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삶이었다. 열심히 걸으며 주변 풍광을 감상했고 기억에 아로새겼다. ‘아로새기다’라는 단어는 의미만큼이나 말소리도 아름답다. 이 단어 그대로 이 나날들을 마음에 담았다. 덕수초등학교, 경기 여자 중고등학교, 덕수궁 뒷담을 지나 정동까지 가면 정동교회가 나타났다. 정동교회 담은 이화여자중학교의 담장과 이어 있었다. 

첫날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 농구 백보드 서너 개가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동덕여자고등학교 담장 너머로 바라보던 그 백보드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소원대로 농구를 할 수 있나 보다 하는 느낌이 왔다. 학과목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것도 있구나 싶어 흥미가 일었고 앞으로 잘해봐야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나는 이런 면에서 욕심쟁이이기도 하다. 특활반 제안이 눈앞에 활짝 펼쳐 있는데 시간은 한정적이고 어느 반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31개의 아이스크림 맛 중 어느 것 하나를 고를까 하는 고민보다 훨씬 큰 심각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환경은 활력을 새로이 솟게 했다. 방과 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적어도 세 가지 특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다. 나는 먼저 화가의 꿈을 따라 우선 미술반을 들었고 그다음엔 동덕여고 담장 너머로 동경했던 농구부를 선택했다. 그리고 달리기에 소질이 있어 육상부도 들었는데 육상부는 대회가 있을 때만 달리기 하러 갔다. 사실 육상 연습을 하지 않아도 경기 날짜가 가까이 오면 김혁진 육상 선생님은 농구 연습장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연극반, 합창반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고픈 활동이 무척 많았지만 꾹 참았다. 모든 수업과 활동을 마치고 어둑해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면 잠이 한꺼번에 쏟아져 책상에 코를 박고 이마를 부딪치기 일쑤였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학교 활동을 해나갔다. 학교생활은 하는 만큼 더욱 재미있고 즐거워서 시간을 쪼개어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빠짐없이 실천했다.

어린 시절의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단단히 다져진 기초체력은 90세를 넘길 때까지 나의 건강을 지켜주었다. 꾀를 부리며 매일의 궤도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을 아끼느라 웬만한 거리는 급한 성격에 뛰다시피 걸어 다니고 차분하게 앉아 그림을 그렸고, 운동장이 좁다 하고 달리기를 하고 농구부에서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한 덕에, 비록 11년 전에 양 무릎 연골 수술은 받았지만 그 덕에 미국 드라마 <6백만 불의 사나이>, 아니 여자이니 '바이오닉 우먼' <소머즈>처럼 스테인리스 스틸 무릎을 장착하고 잘 걸어 다니며 91세인 지금까지 건강을 확실히 유지한다. 

현재 12년째 살고 있는 실버타운 '노블레스 타워‘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문화예술, 체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나는 노래 모임 프로그램과 고령 체조 프로그램에 매주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멤버이다. 참가하고 있는 '가곡, 가요 클래스'에서 노래를 부르면 상쾌해지고 즐겁다. 단지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그러하다기보다 노래 교실을 인도하는 선생님과 공통 관심사를 갖고 함께 노래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면 맑은 에너지가 어우러지며 상승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이 행복하다. 무료하거나 늘어지지 않고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쓰이는 느낌이 좋다. 노래교실에는 노래책을 옆구리에 끼고 가고 체조 시간에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참여한다. 아무거나 입고 가는 것보다 정식 체조복으로 차려입고 운동 시간에 임하는 것이 수업을 듣는 ‘학생’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 나이들었지만 운동복도 나름 색상을 맞추느라 신경쓴다. 오늘 입은 나의 봄가을 운동복은 웃옷은 핑크, 아래 옷은 회색 바지를 선택했다. 일반 평상복을 고를 때는 70대까지만 해도 선택하지 않던 오렌지, 주황, 붉은 컬러 등 화사한 계열의 옷에 눈이 간다. 막둥이는 내게 색이 진하고 튄다, 너무 번쩍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색상 선택으로 미루어 보아 나이 들어가는 티는 저절로 나오는가 싶다. 1945년, 1946년, 1947년에도 이런 준비 자세로 학교에서 지정한 흰 셔츠에 검은 반바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농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섰다. 어린 소녀 '박정숙'이나 나이든 지금이나 행동하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핑크와 회색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체조교실로 나서는 내게 막내딸은 여덟 살 아이가 마치 발레 수업을 들으러 가는 모습 같다고 웃는다. 나는 농구공을 한 팔에 끼고 농구장으로 나섰던 날이 생각난다. 

나는 백 넘버 6번 선수
1940년대 당시 인기 종목이었던 농구 경기. 이화 여자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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