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 91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6년
나는 1929년생 엄마, 박정숙의 막내딸이다. 어느 날 엄마가 자서전 한 권을 남기면 어떠냐고 은근히 말을 건넸다. 엄마가 살고 있는 실버타운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활동 프로그램 중에 '자서전 작성' 프로그램이 생긴 것이 이즈음인 듯하다. 아마 그러한 글쓰기 프로그램이 활성화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반인 실버 세대들의 일상을 기록한 자서전 붐이 일었던 듯하다.
어릴 때 엄마 무릎에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던 기억이 난다. 그 옛날이야기에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제일 무서운 곶감 이야기도 있었지만 엄마의 실제 경험담인 일제강점기, 1·4 후퇴 때, 그리고 대학 시절 이야기들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동화 속 스토리처럼 언제 들어도 재미나게 풀어주었다. 들으면서 상상을 했다. 나의 상상은 무섭지 않은 아름다운 전쟁을 그렸고, 동화 속 동물 이야기는 만화영화가 되었다. 엄마의 인생은 그렇게나 재미난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래도 자서전을 제작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대 방향에 나는 섰다. 종이는 귀한 것이다. 아무나 글을 올려서 낭비할 대상이 아니다. ‘읽히지 않고 버려지는 수많은 종이 인쇄물이 더 이상 양산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더욱이 나는 어르신들이 마케팅 전략이나 상술에 어수룩하게 당해서 자서전을 출판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2017년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원하는 바를 ‘쟁취’할 때까지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듭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자서전 이야기를 무심한 듯 강하게, 은근하고 조용하게 슬쩍 거론했다. 인간의 생은 유한하고 가져갈 것도 남길 것도 없는 '공수래공수거‘ 인생인데 자서전으로 남기려고 하는 자체를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개똥철학이라도 이런 지론으로 무장된 나였으니 엄마의 말은 내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그럼에도 갑자기 '엄마가 처음 다녔던 그 회사가 정확히 뭐 하는 곳이지?' ‘그 회사에 어떻게 들어갔지?’ '피난지인 부산에서 학교를 어떻게 다녔다고 했지?'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돌연 막막해졌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의 인생 소사(小史)를 A4용지 대여섯 장에라도 메모해둬야겠다고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혹시나 이다음에 단 한 명, 나의 아이가 할머니가 어디서 무엇을 하셨냐고 묻는다면 “모른다”는 한 마디로 답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최소한의 기록을 해두기로 했다.
2018년
멀고 긴 여행을 떠났다. 30년간 품어온 나의 버킷 리스트 <모녀 세계 일주 여행>은 올해 꼭 실행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사명'으로 여겨졌다. 아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기 직전 시기는 딸아이와 함께 1년 여행을 실천할 절호의 기회였다.
2003년 이후 근 10여 년 동안, 119로 연락하고 응급실이나 집으로 달려가길 수차례 치렀다. 한밤중이든 새벽녘이든 눈 비비며 어디 가냐는 아이를 두고 부모님 댁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런 생활이 다시 찾아온다면 아이와 온전히 소통할 순간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딸아이와 단 둘이 일 년 365일 계획으로 지구 여행을 떠났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씩씩한 엄마가 굳건히 서울을 지켜내기를 바랐다.
여행지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사업 확장에 대한 궁리나 멀리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만큼 나를 안으로 더욱 굽어보게 되었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박물관>, 터키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등 여행 중에 자그마한 박물관을 돌아보며 개인의 기억과 기록이 결국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작은 벽돌 한 장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가면 엄마의 90년을 기록해두자는 마음을 굳혔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나를 위해서이고, 엄마는 유명한 위인은 물론 아니지만, 언젠가 손주들이 할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적어도 찾아볼 수 있도록 엄마의 일생과 사진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2019년
새해를 맞았다. 엄마는 12월 31일과 1월 1일의 단 하루 차이로 지난해와 달라졌다. 엄마는 힘겹다, 어렵다는 단어를 90 평생에 처음으로 입에 올려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함께 산 57년 동안 나도 처음 들은 말이었다. 항상 밝고 기운이 넘치고 새로운 뭔가를 시도했던 엄마였다. “신문의 작은 글씨가 작년처럼 보이지 않고 기력이 달린다.”라고 했다. 90세까지 육안으로 자잘한 약통의 글씨도 다 읽었는데 이제는 잘 안 보인다고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오감각(五感覺)을 90 평생 부족함 없이 누리고 있으니 이만큼 주어진 것도 큰 복이건만 나이 90에 백내장 수술과 녹내장이 가져온 불편함으로 우울해했다.
자문인지 질문인지 “내년에도 내가 여기 있을까?”라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목소리가 짜랑짜랑한 거 보니 100세도 더 살 거라고 말은 했지만 한없이 무거운 심장이 목울대를 잡아 끌어내리는 듯했다. 100세라는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엄마는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고 살아가기가 이리 힘든데 허튼소리 말라고 했다. 꼬장꼬장하게 서 있으려 하지만 떠날 날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서글픔이 몰려왔다. 그런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0년을 더 살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날, 마음 놓고 함께할 수 있는 날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뿐이었다. 지금, 시작하기로 했다.
2019년 2월
거의 매일 엄마네 집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앨범과 사진을 뒤지고 낡아 바스락 소리를 내는 오래된 종이 뭉치를 들춰냈다. 듣고 쓰고 묻고 답하고, 사진을 스캔하고 엄마의 기억을 일깨우고 정리하며 장장 90년 인생을 채록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시작을 했으니 ‘마감’을 하기로 했다. 70년, 80년 전 사진들을 펼쳐보고 그 속으로 파헤치고 들어가 세세한 기억의 결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작동시키는 것이 심히 버거울 만큼 엄마는 그 사이에 더 나이가 들어버렸다. 딱히 병이 난 것은 아닌데 전체적으로 약해져 버거워했다. 무릎에 무거운 앨범을 얹어 놓을 수도 없다.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낙엽 한 잎만 같았다.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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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록을 어떻게 정리할까 하는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88, 89, 90… 91세의 엄마를 바라보면 희로애락이 점철된 일생을 다 보내고 ‘지금, 여기, 있다’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엄마뿐만 아니라 70, 80, 90년의 지난(至難)한 세월을 버텨낸 이 반도의 모든 여성들을 향해 무한한 존경심이 인다. 사람들은 엄마의 고운 얼굴만 보고 평탄하게 순탄하게 살았겠다고 그야말로 쉽게 속단한다. 엄마는 1929년,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일제 식민시대를 겪고 이제 겨우 살아보나 싶더니 3년의 긴 전쟁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20대를 맞았다. 피난지에서부터 아르바이트와 학업, 직장생활을 치열하게 하고 50년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나아 키우고 일곱 손주를 본, 이 땅에서 91년째 살아가는 여자의 일생이 어찌 평탄하고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각자에게 주어진, 어느 누구의 삶이 쉽기만 하겠나 싶다. 생의 91번째 해로 2019년을 맞이하고 단지 두 다리로 서고 걷고 웃고 식사를 하는 삶이 주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쌓은 삶만이 대단한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범인(凡人)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노력과 시도를 통해 결국은 무탈한 모습으로 오늘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 할 수 있다. 근 100년에 가까운 일생을 살아낸 엄마의 삶, 한 여자의 삶 자체가 이제는 신기(新奇)하게도 기적(奇蹟)으로만 보인다.
엄마는 위인이 아니니 엄마의 자서전 쓰기는 실버마케팅 영향 때문이라고 일갈했던 나의 고집은 사그라들었다. 엄마의 삶 90년을 넘나들면서 모든 삶은 위대하며 저마다 의미가 있고 기록될 가치가 있었다. 엄마의 삶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