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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뷰 Apr 11. 2021

아름다웠던 모로코, 인샬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다시 페즈로 향했다. 모로코에 온 지 39일 만에, 한국을 떠나 온 지는 석 달 만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웃기게도 모로코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 온 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도 새삼 새로웠다. 모로코에 오기 전, 두 달을 꼬박 유럽에서 머물렀지만 유럽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로 유럽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온통 모로코였다.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스물여섯 번째 맞는 여름은 참 뜨거웠다. 무엇하나 딱히 내세울 것 없었어도 오랜 시간 품어왔던 낯선 땅을 밟겠다는 꿈을 눈 앞에 꺼내 놓았다는 것만으로 생기가 가득했다. 이루어지고 있는 꿈이 아무렇게나 지나가 버릴까 봐 아무리 먼 길이라도 구석구석을 내 걸음으로 채웠다. 발이 부어 지난겨울 인도에서 산 발가락 반지가 조여와도 집으로 가는 길 10 디르함짜리 샌드위치 하나 안고 있으면 그게 내 그늘이 되었다. 막 구운 바게트와 손때가 묻은 컵에 오렌지주스 한 잔이 내 스물여섯 번째의 여름이었다. 그걸로 그 뜨거운 해 아래 그늘 하나 없어도 그늘 사이를 걷는 것 같았다. 


한 달씩, 두 달씩 여행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처음보다 힘든 일이 많았다. 그만큼 생각할 일도 많았고,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많았다. 그래도 내게 모로코가 특별한 이유는 유독 '살아있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알아갔다.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기회도 생기겠지만 지난 내 삶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살아있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머무르던 곳을 떠나 오기 전에 내게 그런 순간들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만큼 시간을 흘리고 살았다. 


그래서 모로코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부터 특별한 것까지 모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보냈다. 모로코는 한 나라지만 여러 나라를 여행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도시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온도가 달랐고, 사람이 달랐고, 색이 달랐고, 향이 달랐다. 그래서 돌아다니는 내내 또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다. 어떤 곳은 끔찍했고, 어떤 곳은 순간이 영원처럼 남았으면 했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 만큼 찝찝하고 불쾌한 만남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내가 잃은 것은 없었다. 생각지 못한 것을 얻었고,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영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풍경이 내는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웠다. 감사함을 배웠고, 이해함을 배웠다.


무엇보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이 의미가 컸다. 사실 모로코 관련 이미지를 검색하면 인물사진보단 고양이 사진이 훨씬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진에 찍히게 되면 혼이 달아난다고 믿는 독특한 미신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밀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피하는 사람들, 인상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풍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을 때도 자신이 찍힐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인상을 쓰며 피하기 일쑤였다. 


그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든 것은 아니지만 내 카메라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해하니 나도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런 미신을 진짜로 믿는 이들에게 카메라는 총구와 다름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 후론 카메라는 웬만하면 꺼내 들지 않았다. 꼭 찍고 싶은 것이 생기면 사람이 아니더라도 허락을 먼저 구했다. 


책을 만들면서도 사진과 드로잉 중 어떤 것을 실을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을 모로코의 누군가가 볼 수 있는 확률이 적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사진을 넣기에는 카메라를 총구 마냥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모로코는 찍어 남기는 곳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머리에 떠올리는 나라이기에 그런 미신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풍성한 경험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래서 어떤 삶을 꾸려갈지, 내게는 어떤 힘이 생겨났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그늘 없이도 그늘을 걷는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이 한국에서는 어떤 힘으로 발휘할까. 추억으로 남긴 여행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기쁘다.


나를 위해 기록했던 모로코를 다시 돌이켜보면 추억은 혼자서 만들어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좋은 추억이건, 나쁜 추억이건 모두 사람이 있었다. 특별하고 아름다운 순간 사람이 없어도 그 순간을 누군가와 나눌 때 더 특별해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믿는다.


각 도시에서 만난 수많은 사건, 사고와 그때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좋은 모로칸들과 경험을 나눔으로 인해서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나의 곁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인샬라. 아름다웠던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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