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인문학
편안함이라는 이름의 병, 우리는 아파야만 착해지는 걸까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미움과 다툼의 목소리는 왜 이리도 높은지,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들이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합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제 안의 조금은 짓궂고 불편한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 편해서 병이 난 게 아닐까?’
우스운 생각일까요? 하지만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배부르고 등이 따스할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교만해지던가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타인의 작은 실수는 너그럽게 넘기지 못하며, 나의 작은 성취는 세상 가장 큰 업적이 됩니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삶의 작은 고통과 마주하게 됩니다. 간절히 원하던 일이 좌절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거나, 예기치 못한 병으로 끙끙 앓아눕게 되는 순간 말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바로 그 ‘아쉬움’과 ‘고통’의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고집스럽던 어깨의 힘을 빼게 됩니다. 나의 자존심보다 상대의 도움이 절실해지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거두어 자신을 돌아보게 되죠. 그제야 다른 사람의 아픔이 눈에 들어오고, 평범했던 일상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더 얄궂은 것은, 그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자신입니다.
목마를 때 마셨던 물 한 잔의 소중함은 갈증이 해소되는 순간 희미해지고, 아팠을 때의 서러움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고통 속 겸손’은 유통기한이 정해진 임시 처방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일까요? 우리는 정말 고통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아야만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일까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면,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역사, 철학, 예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들은 어쩌면, 이 얄궂은 ‘본성의 리셋 버튼’을 누르지 않기 위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분투가 아니었을까요.
편안할 때, 의식적으로 불편했던 때를 기억하는 것. 배부를 때, 굶주렸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성공했을 때,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과거의 나를 잊지 않는 것.
어쩌면 진정한 인간성은 고통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 속에서 '지켜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파야만 착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아픔을 기억함으로서 더 깊어질 수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오늘, 혹시 너무 편안해서 잊고 있는 것은 없으신가요? 우리 안의 ‘편안함이라는 병’을 다스리기 위해, 오늘은 어떤 기억을 꺼내보면 좋을까요. 세상의 소란함 속에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돌아보는 조용하지만 감사한 가을의 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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