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진심 人
요즘 우리는 가슴 아픈 뉴스들을 너무나 자주 접합니다. 자신의 아이를 홀로 힘겹게 낳아 세상을 떠나보내거나, 기나긴 고통 끝에 아이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분노하고, 이내 묻게 됩니다.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지? 모성애가 사라진 걸까?"
이 질문, 어쩌면 우리 모두가 틀린 질문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모성애'라는 이름의 생존 프로그램, 그것은 사랑이기 전에 생존 전략입니다.
우리는 '모성애'를 무조건적이고 신비로운 사랑의 힘이라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수만 년의 데이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성의 '돌봄과 연대' 본능은 사실 우리 조상들이 혹독한 환경에서 자신과 아이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설계한, 매우 정교하고 현실적인 '생존 프로그램'에 가깝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나와 내 아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희망과 안전 신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나요? 천문학적인 양육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독박육아'라는 차가운 현실, 그리고 나를 도와줄 든든한 공동체의 부재.
이런 신호들 속에서 한 개인의 뇌는 '생존 모드'가 아닌 '비상 탈출 모드'로 전환됩니다. 뇌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계산기입니다. 생존 확률이 없다고 판단되면, 가장 소중한 것부터 포기하도록 설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비극은 모성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 '오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어온 '모성애'는 사실 150년 된 신화일지 모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애롭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상'은 과연 인류 역사 내내 존재했을까요?
놀랍게도, 역사학자들은 이 이미지가 산업혁명 이후 '가정'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여성을 그 안에 묶어두기 위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비교적 현대적인 '발명품'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 이전의 인류는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마을이, 부족이,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키웠습니다. 육아는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모두의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머니 한 사람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헌신적인 '모성애 신화'의 주인공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주인공을 도와줄 모든 조연과 무대장치를 치워버린 셈입니다.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 배우가 어떻게 희극을 연기할 수 있을까요?
이제, 왜 인구가 줄고, 아이를 낳아도 걱정 안 낳아도 걱정으로 몰고 가는 사회를 직시해야 합니다. 정책으로만 과연 해결이 언제 될까요? 100년 뒤? 해결이 안 되는 것을 질질 끌면서 해결될 거라는 희망고문대신 현실직시와 함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실가치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출산'이라는 무대 자체에 오르기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는 처절하고 합리적인 자기 보호일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왜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나?'라는 비난의 화살을 거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 사회는 그녀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단 한 뼘의 안전망도 되어주지 못했는가?"
아이를 버린 것은 어쩌면 어머니 개인이 아니라, 어머니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 전체일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비명이 되지 않는 사회, '엄마'라는 이름이 감옥이 되지 않는 사회. 그것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5년 지금의 세상에서는 여자도, 남자도, 남자도, 여자도 그 누구가 먼저고 나중이 아니며, 누가 더 잘났냐? 누가 더 피해자냐로 코스프레하면서 살 수 있는 여유만만한 시대가 아님을 느낍니다. 중요한것은 '맞냐 틀리냐'의 질문이 아닌 '어떻게 하면 함께 해결할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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