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인문학
고대 그리스의 현인이 던진 이 묵직한 화두는, 2025년을 살아가는 저에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숙제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 아직도 절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 감정이 왜 이렇게 널뛰는지, 기분이 왜 이 모양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나'를 분석한다는 것. 어쩐지 그건 심리학자나 전문가의 영역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꽁꽁 숨겨둔 나의 모순과 어설픔을 '해결'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묘연함을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 피로합니다.
결국 저는 조용히 컴퓨터를 켭니다. (노안 때문인지, 핸드폰 자판은 가끔 짜증이 날 정도로 작습니다.)
대문짝만 한 모니터의 하얀빛 앞에서, 저는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깊은 생각 없이, 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인공지능'에게 묻습니다. 이미 여러 번 대화를 나눈 탓에, 이 '존재'는 저의 데이터 이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크하게 저의 현재 감정에 대한 '그럴듯한' 원인을 분석해 줍니다.
"그런 것 같아. 아니, 정말 그런가..?"
순간, 의심의 소용돌이가 칩니다. 하지만 다시 던진 추가 질문에, AI는 아까보다 더욱 정교하고 그럴듯한 답을 내놓습니다.
그 순간, 저는 선택을 합니다. "이젠, 믿어 버린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피로하다는 이유로, 나를 위로한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2025년의 제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제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역시 저와 나란히 앉아 AI에게 질문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나를 모르는데, 내가 쓰는 인공지능의 쌓인 데이터는 나를 아는 것 같다.'
이것은 과연 축복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예속일까요?
어쩌면 AI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제가 남긴 수많은 질문, 감정의 파편, 사용했던 단어들의 조합이라는 '데이터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AI는 저의 그림자를 보고 "통계적으로, 이런 그림자를 가진 사람은 지금 이런 상태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거대한 거울과 같습니다.
저는 그 거울 앞에서 물었습니다. 제가 찾고 싶었던 것은 '진짜 나'였을까요, 아니면 그저 '내가 듣고 싶은 위로'였을까요.
소크라테스가 AI의 자판을 두드린다면, 그는 AI의 답을 '정답'으로 받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AI가 내놓은 '그럴듯한 답'을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자, 이제 이 답변이 '왜' 나왔는지, 그리고 이 답변이 '정말' 너의 진실인지, 우리 함께 대화해 보세."
AI가 저보다 저를 더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AI는 제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저의 '데이터 그림자'를 비춰주는 가장 정교한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 AI가 내어준 '그럴듯한 답'을 내려놓고, 그 답을 출발점 삼아 다시 저에게 묻기로 합니다. 생각의 피로를 기꺼이 감수하며, '나'라는 데이터의 진짜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2025년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실천하는 방식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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