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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ug 10. 2024

버팀목(1:57-80)

알을 깨고 나아갈 수 있기를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정해놓으셨다.


보통 이름에 사용하는 '동'자는 東(동녘 동) 자를 많이 사용한다. 나의 경우는 棟(용마루 동) 자를 사용했는데 집안의 대들보가 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한 글자는 돌림자였다.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끝글자를 아버지의 형제들은 중간글자를 나의 대에서는 다시 끝글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름만 들으면 학렬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려도 나보다 학렬이 높으면 아저씨가 될 수 있고, 할아버지도 될 수 있다. 이름만 알아도 같은 씨족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가랴의 아들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라고 권한 친척들의 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들어도 가문의 일원이라는 걸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가문을 중요하게 여겼던 걸까?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가문의 영향력이 중요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속 최민식 씨(극 중 최익현)가 경주 최 씨 충렬공파 35대손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많은 로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가문을 중요하시하는 문화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문의 영향력이 내부의 구성원들을 지키는 힘이 되어 주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장손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친척들은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잘 보고 따라간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다행히도 그 말은 큰 무게감이 없었고, 나는 '이 씨 집안 장손'이라는 정체성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기는 하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지 않았다면 어땠겠는가? 과연 내가 이 씨 집안의 장손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요한이 사가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는 사가랴 가문의 일원다움을 강요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제사장 가문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게 그의 운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에게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라고 하는 지원군이 있었다. 문화와 시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이의 운명을 결정지으려고 한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겠다고 말했다.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것은 그 아이를 시대와 문화의 틀에 가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아이는 사가랴의 아들이기 전에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사람들은 아이에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정체성을 강요할 때가 많다. 아이다움, 학생다움, 입시생다움, 취준생다움, 신입다움, 부모다움 등 사회 안에는 수많은 정체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사가랴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결정한 후 성령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했다.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언뜻 보면 사가랴가 아들의 정체성을 선지자로 규정한 듯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앞서서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앞서서 걸어가는 자는 틀에 갇힌 인생을 살 수 없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또한 그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명령한다. 


신은 사람이 자신보다 앞서가기를 바랐다. 신의 뜻에조차 갇혀 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틀을 깨고 나아가 참된 길을 찾기를 바랐다. 도덕적인 틀, 문화적인 틀, 시대적인 틀 안에 갇혀 있는 자는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는 자는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빈 들에 사는 인생이어도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자가 사람답다. 


자식을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알을 깨고 나아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아버지는 성령충만한 아버지이다. 막내다움을 강요하는 회사에서 사람다움을 먼저 말하는 상사도 충만한 사람이다. 사상을 주입하려 드는 곳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복이다. 틀을 깨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구원자이다. 


누군가의 존엄을 위해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사가랴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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