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아이(1:5-25)
성스러움을 대하는 태도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매혹적인 동시에 두려운 존재.
사람들은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마주할 때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만 또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태도를 동시에 보인다. 사이비 교주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해가 쉽다. 늘 다가가고 싶어 하나 막상 다가가면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대할 때는 어떨까? 사실 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생각으로만 신성하다고 여길 뿐 매혹적이지도 두렵지도 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고 말하지만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성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신성을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예배'이다. 예배를 위해선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장소, 사람,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특정한 장소와 사람, 그리고 시간에 신성을 부여했다. 성막과 성소, 제사장과 안식일 등을 거룩하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한다. 매혹적인 장소를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선다. 제사장을 만날 때도 그렇고 안식일을 지킬 때도 그렇다. 한 권사님은 단에 올라 걸레질을 하실 때에는 늘 무릎을 꿇고 손걸레로 바닥을 닦으시는데 그 마음이 바로 신성을 대하는 태도일 테다. 그런 분들은 목회자를 대하는 태도도 남다르다. 예배시간에 어떤 태도로 앉아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된다.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되었다. 성전 분향은 제사장들에게도 특별한 일이었고, 일생에 한 번 또는 기껏해야 두 번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예상이 간다. 매우 기쁘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테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가 나타난다. 안 그래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던 사가랴는 무서움에 사로잡힌다. 그때 천사는 사가랴에게 소식을 전한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너도 기뻐하고, 많은 사람들도 기뻐하리니,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아이에겐 하나님의 신성이 가득하다는 이야기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 져 숨을 쉬는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가랴는 신성한 직분을 가진 자로써 신성한 시간에 신성한 곳에서 신성한 행위를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진실로 성스러운 존재였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나는 평소 사람을 신성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사람을 매혹적인 존재로 여기고, 또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로 여겼을까? 가까우면 편해지고, 어려우면 사랑스럽지 않은 관계를 맺어오지 않았을까?
성경은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신성이 담긴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랑스러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 가까워지고 싶으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존재. 누가는 사람의 신성이 살아나는 세상을 원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