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침투적 관계(2:1-20)
진정한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가.' 인류의 숙제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평화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고 그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고 더 사랑하게 되는 평화를 원한다면 갈 길이 멀다. 반면에 다투지만 않아도 평화롭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멀지 않을 수 있다. 적극적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과 소극적인 평화를 원하는 사람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로 생각하는 소극적 평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팍스 로마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약 200년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외부의 침략도 없었고, 큰 반란이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평화'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면 왜 이 시기에는 별 다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만큼 로마의 힘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가장에게 힘이 있으면 가장의 말을 따름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중 남고를 나왔던 나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친구 사이에도 미묘한 서열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번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너 좀 개기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표현 하나로 수평적 관계는 수직적으로 변한다. 친구끼리 뒤통수를 때리는 등의 심한 장난을 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장난이야."라는 말이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타날 때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경우 갈등이 표면화되기 위해서는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꾸어놓으려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친구끼리 개긴다는 말을 해?"라고 말하면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상대방이 싸움을 잘한다면 십중팔구 어물쩍 넘어간다. 폭력에 대항할 힘이 없는 경우에도 소극적 평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
로마 황제가 천하의 백성들에게 호적 등록을 명한 일은 명백히 수직적이다. 호적의 목적이 백성에게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지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령이 불합리하여도 천하의 백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상태. 이 상태를 로마의 평화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밤에 들에서 지내고 있었다. 부자들의 많은 가축을 성 안에서 기를 수 없었기에 고용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밑바닥 인생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로마 황제에게 대항할 수 없는 유다의 백성들도 목자들 앞에서는 고개가 뻣뻣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일들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이 동생을 억압하는 경우가 그중 하나다. 수직적 구조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들이 또다시 수직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소극적 평화의 신봉자가 된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워."
"잔 말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이와 같은 말은 로마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힘을 과시함으로 약자의 말과 행동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결국 로마의 평화는 목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때 유지될 수 있었다. 자유롭지 못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이어도 그러려니 해야만 평화가 깨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이런 세상에서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권력자는 약자의 삶에 침투하지만 아래에서 위로의 침투는 평화를 깨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람은 소극적 평화를 내면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이 사람을 자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억압을 견디며 평화를 말할 수 있다면 신은 자유롭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소극적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세상에 전쟁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평화가 아니다. 또한 나의 마음에 평화가 있어도 타인이 억압을 받고 있다면 이 또한 평화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무너졌는데 세상이 평화롭다고 한들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결국 적극적으로 평화를 찾아야만 한다.
로마의 평화 속에서 밀리고 밀린 인생을 살아가던 목자들이 천사를 만났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게 되었고, 그 길로 예수를 찾아간다.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살고 있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난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었을까? 예수가 말 구유(여물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 로마의 궁전에서 태어났다면 그들은 평생 예수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테다. 성 안의 사람들 앞에서조차 마음 것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던 목자들이 예수 앞에서 그들이 본 사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목자들은 예수의 삶에 침투했고, 예수도 그들의 삶에 침투한다. 상호침투적 관계가 맺어지는 장면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혼돈이 깨어지고 빛과 어둠으로 나뉘며, 물과 뭍으로 나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명확한 구분이 있다. 그 구분을 무시하게 된다면 다시 혼돈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구분된 선 사이에 상호침투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낮과 밤의 구분이 있으나 동틀 녘과 해 질 녘이 있다. 물과 뭍의 구분이 있으나 모래사장과 바닷물의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가 없다. 구분이 명확하지 않음은 바다가 땅을 침투해서인가 아니면 땅이 바다를 침투해서일까? 창조세계는 구분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의 구분을 무시하지 않은 채 상호침투적 관계를 맺을 때 평화롭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분은 있으나 상호침투적인 관계를 맺을 때 평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 일방적 침투가 빈번한 세상에서 상호침투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권력을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내가 싸움을 잘한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아버지는 근엄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버리고, 만만히 보여선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은 탄생이었다. 신의 아들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는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목자들은 평화를 얻었다. 평화는 하늘에서 이루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땅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기꺼이 땅으로 내려올 때, 권력이 기꺼이 가벼워질 때 땅은 평화롭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당신의 마음이 진정한 평화를 이루게 될 때 하늘에서도 영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