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봐 주는 사람(2:21-52)
마음에 두고 있어야 보이는 것
어른들은 아이들의 장래에 관심이 많다.
첫돌을 맞은 아이에게 돌잡이를 시킬 때 그 마음이 드러난다. 실, 돈, 연필, 청진기까지 전통적인 욕망 옆에 현대적 욕망까지 함께 올려두고 아이의 행동에 주목한다. 아이의 손이 어른의 욕망을 채워줄 때 어른들은 기쁨을 얻는다.
일종의 점을 치는 행위에도 이렇듯 마음을 많이 쏟는다면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쏟는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공부를 잘하면 기대가 부풀고, 하루종일 놀기만 하면 심히 걱정스럽고 불안하기까지 한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알아차리게 된다.
문제는 아이가 부모의 욕망을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부모가 욕망하는 것처럼 아이도 욕망하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는 자기의 욕망대로 살고 싶어 한다. 먹고, 놀고, 게임하고, 운동하는 모든 행위들은 욕망을 채우려는 행위이다.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은 욕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 난감한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스스로의 욕망과 부모의 기대가 충돌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런 때에는 누구의 욕망을 따라야 할까? 부모가 자기의 욕망을 위해 자녀의 욕망을 억제한다면 아이는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모는 왜 자기의 욕망을 자녀에게 투여하게 될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욕망을 채우지 못한 불행에서 비롯되든 욕망을 채운 자의 자부심으로 인함이든 부모는 자녀의 자유를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녀의 욕망은 순수하고 부모의 욕망은 현실적이다. 부모가 더 많은 세월을 살았고 더 많은 좌절과 아픔을 겪어왔기에 그럴 테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의 욕망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헛된 욕망에 끌려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다그치고 채근하는 일이 많다. 아이의 욕망을 억제해서라도 보다 더 참된 욕망을 가지게 만들고 싶은 거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욕망하니까 채우려는 것이고, 욕망을 채워봐야 채우기 위해 노력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앎에 대한 욕망이 자라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모든 걸 물어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과학도서에 빠져있는 아이보다 과학상식을 많이 아는 어른은 결코 많지 않다. 후에 아이가 지식을 잃어버릴 순 있어도 그 순간에는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아이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런데 만약 부모가 아이의 질문을 막아버린다면 어떨까? 아이의 질문을 가볍게 여겨서이든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든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현이든지 간에 아이의 마음은 조금씩 움츠려 들기 시작할 것이다. 욕망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게 되는 거다.
욕망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버린다면 아이의 욕망은 자라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서 채우지 못하는 욕망도 있다는 걸 알아가기도 어렵다. 그렇게 아이의 욕망이 시들면 아이의 마음도 함께 가라앉게 된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친적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사흘은 가야 하는 길을 가던 가족들은 하룻길을 가서야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월절 행사가 그만큼 큰 행사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는 하나 꼬박 하루를 몰랐다는 게 놀랍다.
결국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사흘 만에 예수를 찾았다. 사흘의 시간 동안 예수는 성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는데 예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놀라워했다는 사람들의 반응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떻게 이리 영특할까?'라는 반응과 '어떻게 이리 당돌한가?'라는 반응을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를 만난 마리아는 아들을 다그친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마리아의 반응은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었다. 아이를 찾아 헤매며 졸였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면서 감정이 복받쳤을 테다. 그러나 예수의 반응은 태연했다.
"왜 나를 찾아다니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르셨나요?"
예수의 반응은 아이답지 않은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자기의 운명을 아는 듯이 말하는 경이로움도 느껴진다. 그렇지만 열두 살 아이에게서 그런 경이로움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주목한 바는 어린 예수가 사흘간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부모가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 성전이었다는 점이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울면서 길을 헤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 예수는 안전한 공간을 택했고, 불안해 하기보다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아이였다.
시간을 보낼 줄 안다는 건 욕망을 채우는 법을 안다는 뜻일 수 있다. 만약 예수가 욕망하기를 두려워하는 아이로 자랐다면 낯선 어른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주고받지는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평소 자녀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이리 당돌한가'를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었다는 거다.
큰 일을 겪은 예수의 가족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예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지냈다.
한 가정의 역사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일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 큰 사건을 겪은 후에도 예수의 가정은 안정을 찾는다. 또 아이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아이가 부모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갈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부모가 잃어버린 자녀를 찾았을 때 자녀는 "제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걸 모르셨나요?"라고 물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현대에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모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는 마리아의 반응만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때가 되면 부모는 아이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예수가 성전의 학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자들이 놀라워했다는 건 예수의 욕망이 부모의 욕망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했다.
부모가 아이보다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다. 부모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더라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자세히 지켜봐 줄 수 있을 때 아이는 부모에게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예수는 결코 혼자서 사랑스러워져 갔던 게 아니다. 자녀의 말과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지켜봐 주고 마음에 간직해 주는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어린 예수는 자라날 수 있었다.
신의 아들인 예수가 성장하는 데에도 지켜봐 주는 부모의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귀하고 존귀한 생명이라도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다. 지켜봐 주고 간직해 주는 사람을 통해 아이는 점점 사랑스러워져 간다.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타인의 말과 행동을 가만히 지켜봐 주고 마음에 간직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늘 자기의 욕망이 앞서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의 욕망을 바라봐 주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