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자리에서(3:1-20)
회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세례요한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시절에도 여러 삶의 자리가 있었다. 신분에 따라, 경제적 차이에 따라 또 민족과 직업에 따른 자리들이 있다. 황제, 총독, 대제사장, 세리, 군인 등 본문에서만 해도 다양한 자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떤 자리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을 받는다.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가 그랬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와 분봉왕 헤롯, 또 성전에도 세금을 내야 했다. 심각할 때는 수익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했기에 파종을 해야 하는 씨앗을 먹어버리기도 했고, 땅을 팔아 가족을 건사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 하루가 다 지나도록 일을 구하지 못해 시장에 앉아있던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았던 건 땅을 잃은 농부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유대인이라니. 유대인들은 세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의 개와 같은 존재였다.
군인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로마 황제와 헤롯 왕이 백성을 억압하는 데에는 군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필요하다. 군대는 그 강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군인들이 달가워 보일리 없었다.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을 벌였던 열심당원들은 로마 군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였다. 그들이 로마의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으로 간주되었던 거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은 반복된다.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국적과 민족, 소속된 정당, 종교, 성적지향 등을 싸잡아 비난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본문을 살펴보면 요한이 요단강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죄 사함의 문제를 다루는 곳은 성전이었다.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인해 죄를 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왜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고, 사람들은 왜 성전이 아닌 요단강으로 나아왔을까?
아마도 성전에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테다. 가난한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비둘기를 제물로 드려야 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은 성전에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또 다른 부류는 죄인들이었다. 세리와 군인과 같이 터부시되는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싶어도 성전 출입이 불가했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거나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성전에서 멀어지면 사회로부터 또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죄인이더라도 죄 사함을 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하지만 그들은 죄 사함 받기를 원했다. 세리들도 군인들도 무엇을 해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요한이 그들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생각해 볼 만하다. 그가 세리와 군인의 직업 자체를 악하다고 여겼다면 그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고문기술자가 회개를 하러 왔다면 그 일을 그만두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나치의 고위급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자신은 공무원으로서 법과 질서에 충실했을 뿐 죄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왜 악을 행하고도 그런 주장을 했을까?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주체적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이란 명령을 의심할 필요 없이 따라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군인의 정체성이 있기 전에 사람의 정체성이 먼저 있다. 사람은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모든 판단은 외부의 압력에 의한 판단이어서는 안 된다.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정하는 힘이 필요하다. 죄를 뉘우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난에 휩쓸려 움직이는 게 아니라 양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 이런 사회를 위해서는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정한 돈을 포기하고 양심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기로 마음먹은 세리가 있다면 그는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리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한다면 세리의 회개와 변화는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스스로 의로운 집단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비난하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 세리를 비난하는 데 힘을 다 써버려서 요한이 전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 돼버리고 만다. 의로운 집단, 부정한 집단, 의로운 사람, 부정한 사람은 없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형제의 눈 속에 들보가 있고, 내 눈에 티끌이 있다 하더라도 티끌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