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대장 할머니는 옥상에를 자주 올라가셨다. 꽃도 가꾸고, 상추와 고추도 키우신다. 한 번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떨어진 고추씨를 쪼아 먹었다. 비둘기가 영 살집도 없고 꾀죄죄해서 할머니는 고추씨를 더 뿌려주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더니 친구들을 한 무리 데려왔다. 그 모습이 예뻐서 할머니는 인심을 쓰셨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비둘기가 찾아왔다. 같은 비둘기가 찾아왔을까 싶지만 대장 할머니는 비둘기가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옥상을 두리번거리는 비둘기에게 할머니는 고추씨를 또 뿌려주었다.
“야 아가, 친구들 데리고 오지 말고 혼자 먹어, 고추씨 그게 다야.”
올해는 고추씨를 따로 사지 않으셔서 작년에 남은 씨앗이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둘기는 또 훌쩍 하늘을 날았다. 얼마 후 어김없이 친구들을 한 무리 데려왔다. 혼자 먹으면 배가 찼겠지만 친구들까지 먹기엔 한 참 부족한 양이었다.
“저 먹을 것도 없는데. 꼭 친구를 데려와.” 대장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비둘기는 그래도 의리가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였는데 한참 영화의 재미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공영방송 밖에는 볼 수 없었던 시골에 스카이라이프가 들어온 영향이 컸다. 토요일 밤 식구들이 다 자는 밤에 거실에 나와 불을 끄고 TV를 켰다. 볼륨은 나만 들릴 수 있게 줄이고, 채널을 돌렸다. 배가 출출했다. 찬장을 좀 뒤져보니 크라운산도 한 박스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1L짜리 우유도 있었다. 크라운산도도 우유도 통째로 가지고 나와 영화를 시청했다.
한 참 영화를 보던 중 동생이 나왔다. “안자?”라는 말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다시 TV에 눈을 돌렸는데 동생의 발소리가 멈췄다. 동생은 나를 한 번 봤다가 크라운산도를 보며 말했다. “그걸 다 먹냐?”
다음 날 동생은 엄마 앞에서 짜증스럽게 말을 했다. 크라운산도를 오늘 먹으려고 했는데 새벽에 오빠가 다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그래도 가끔 용돈도 챙겨주는 어른스러운 오빠가 되었지만 비둘기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품없고 꼬질꼬질한 모습이 딱 봐도 고생스러운 삶일 텐데 친구를 데려오는 마음이라니. 나의 행색은 초라하지 않지만 마음이 궁색해질 때가 있다.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 수도 있고, 사랑이 적어서 일 수도 있겠다.
집에 오늘 길에 비둘기를 만났다. 한 없이 초라한 비둘기의 날개 짓이 그토록 자유로워 보인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