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아주세요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음 것 털어놓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가 끝난 날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끝났지만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달리기에서 일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전부터 자랑하고 싶은 게 있으면 늘 달려서 귀가를 했었다. 그럴 때는 꽤 높은 언덕길을 오르내려도 하나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날도 그랬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 층 빌라의 꼭대기를 단숨에 뛰어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이 잠겨있었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바로 전화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금방 오겠거니 하는 마음에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올라오셨다.
“뭐 하니? 부모님 안 계시니?”
“네, 근데 금방 오신데요.”
나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우리 부모님이 아들을 혼자 기다리게 만드는 부모님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걸까? 아무래도 둘 다였을 듯싶다.
그 길로 계단을 내려와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텅 빈 운동장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쓸쓸했다. 발걸음을 돌려 이번에는 친구 집으로 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문을 열자마자 놀라며 말씀하셨다.
“어머, 아직 안 씻었니? 진구 씻는다. 너도 얼른 집에 가서 먼저 씻어. 응?”
“오빠, 아직 안 씻었어?”
먼저 씻고 나온 친구 동생이 말을 거들었다.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몸을 돌이켰다. 다시 계단을 올랐고, 집을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갔던 이유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의 상태를 보고, 왜 그러고 있냐고 묻지 않기를 바랐었다.
한참이 지나 다시 내려가 문을 열어봐도 문은 잠겨있었다. 옥상에 있어서 혹시 소리를 못 들었을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귀가 좋은 게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 옥상 바닥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자식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정말 부모가 맞는 거야?’
‘오기만 해 봐라. 절대 화 안 풀 거야.’
처음에는 마냥 기다리는 마음뿐이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자 서운함이 생기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세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에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화를 냈다.
“아니, 왜 이제와?”
“들어가자”
엄마의 반응은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너무 태연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서운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랬니?”
엄마의 대답은 내가 원하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더 안쓰러워해주기를 바랐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힘듦을 알아주고 안아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엄마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를 얘기했다. 운동회가 두 시쯤 끝나 집에 왔는데 문이 잠겨있었고, 갈 데가 없어 운동장을 배회하다 친구 집에 간 이야기를 꺼냈다. 옥상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하소연했을 때 엄마는 “아이고, 그랬어. 우리 아들?”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제야 나는 못 이기는 척 마음이 풀렸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가 무조건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듯하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서운하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차려 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일. 이제는 그 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줄곧 나의 이야기를 잘 꺼내는 편이기는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끝내 꺼내지 못할 때도 많다. 나이 먹은 아들은 이제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건 어쩌면 그만큼의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나의 모습은 이 만큼이라고 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은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음 것 털어놨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서로 털어놓는 사이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