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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나로 만들까

병상의 할머니와 마주하며

지난주 서울에 다녀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막 확산되기 시작할 때였다. 2월 18일쯤 들어갔는데 19일에 아직 확진자가 50명 수준이었으니까...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입원중이란 말을 듣고 급히 갔다.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거의 말하지도 못하고 뭔가 들으면 응, 응, 하는 반응 뿐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갔고, 부정맥이 심해 바이탈 사인 측정하는 모니터가 거의 5분 간격으로 울어댔다.


2주일째 식사를 못하고 유동식이 튜브를 통해 코로 들어가니

배도 고프지만 식사하는 행위가 사무치게 그리우셨나 보다.

눈을 감고 자꾸 입으로 손을 갖다대는 시늉을 반복하셨는데 (가족들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고)

무의식 중에 손으로 밥을 떠서 먹는다고 상상하고 계신 거였다.

'먹는다'는 행위는 건강한 인간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기본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극단적으로 지속되면 이런 모습까지 마주하게 된다.


매주 마감이 끝나고 차를 몰아 가면 투석한 몸으로 자정까지도 날 기다리던 할머니였는데,

나의 돌봄, 안마, 부축, 내가 해주는 모든 걸 좋아하던 할머니였는데,

이젠 나와 대화할 수도, 좋아하는 표현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서울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든 느낌은,

'내가 가도 할머니가 모른다면 의미 없지 않나?'

'나의 돌봄을 할머니가 못 느낀다면, 내 병문안이 의미 없지 않나?'였다.


손주와 자식의 차이가 여기서 오지 않나 싶다.

엄마와 이모들 셋은 거의 전투하다시피 모든 지식, 인맥, 정성, 시간을 끌어모아 할머니를 소생시키려고 3주째 매달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의논하고 영양제와 약을 넣어가며 침대 각도, 약 넣는 시간과 속도, 자세, 양치, 소화, 간병 스케줄 모든것을 세심하게 챙긴다. 91세 노모를 살리려고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짜내고 있다. 자매 중 둘이 의사인제, 병원이 하도 환자 케어를 못해서 자신들이 최상의 의료를 공급하려고 200% 애쓰고 있다.


이걸 보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지금까지도 매주 두번 투석하랴, 겨우 밥 챙겨 먹으랴, 그러다 넘어지시고, 다치고,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의 삶이 비참하고 고통스럽다고 말하곤 하셨는데 이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더 살려봐야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실까? 의문이 생긴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무엇이 너를 너로 만드는지 생각해 봐.

너가 뇌 사고를 당해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감각을 느끼지 못하면, 너는 너인가?

너가 지금의 외모와 완전히 딴판이 되면, 너는 너가 아닌가?

너가 현재 직업을 잃어버리고, 지금 하는 일을 아예 하지 못하게 되면, 그래도 너는 너인가?

무엇이 너를 너가 되도록 하고, 너가 아니도록 할까?


무엇이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고, 그 사람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걸까?

만약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천천히, 지속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다.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는 내 외할머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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