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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Sep 22. 2022

시 없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는 내면의 의지가 외면으로 옮겨지는 말이다. 의지는 있지만, 할 수 없는 숱한 일들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사회라지만, 노력해서 얻는 것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 노력해서 얻는 것, 노력해서 얻을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하는 것, 이에 값을 매기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솔직히 브런치 공모전에 낼 주제를 생각하다가, 시 없는 삶에 대한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어 한참을 고민했다. 책을 쓰기 전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 책 제목을 짓기 위해 초록 검색창에 검색을 해 보았더니, 웬걸 이렇게 똑같기도 어려운 똑같은 제목의 책이 있었다.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작가 페터 한트케의 신작이었다. 글쓰기와 책 읽기를 널뛰는 나의 버릇의 연장으로 일단 책 제목은 접어두고, 새 책에 마음이 갔다. 희곡과 소설을 주로 쓴 이 대 작가도 시 없는 삶을 두려워했을까. 그는 그에게 있어서 시가 없는 삶을 생각한 걸까, 아님 시의 존폐에 대해 이야기한 걸까, 작가의 생각이 무척이나 궁금해져 다음에 서점에 가면 꼭 찾아보려고 적어 두었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들 속에 시가 사라질까 두렵다는 생각이 자주 스쳐 지나간다. 글도 하나의 콘텐츠로서 판단되는 사회에서 과연 시는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 답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쟁 시장에서 제 역할을 못하는 시가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영영 노래하기엔 시인은 늘 배가 고프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 가난한 것은 변한 것이 없지만, 달라진 것은 시의 값어치 또한 굶주리며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제 시를 사랑해서 남은 이들은 시인이거나, 시를 쓰거나, 시화를 그리는 사람들뿐이지 않나 싶다. 결국 시를 읽는 이들은 시인 그 자체뿐이라는 것인데, 그럼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해버리면, 시인은 시도 독자도 본인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써야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것은 슬프다.


  출판 시장이 망해간다고 하지만, 아직 콘텐츠의 힘은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 이가 없을 뿐이지, 책으로 만든 드라마나 영화 등은 불티나게 팔린다. 그러나 그 넓은 시장에 시가 설 자리가 없다. 사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온갖 종류의 사랑을 노래하고, 때론 비난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을 살리고, 작은 행복을 찾고, 파편 같은 삶의 조각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대단한 일들 뿐인데, 그 대단한 일도 읽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라는 시집을 잊을 수가 없다. 북한의 실상을 담은 시집이었지만, 저항이었고, 고발이었고, 도와 달라는 외침이었다. 아이를 백 원에 판 모진 엄마는 백 원으로 빵을 사서 아이 입에 넣어주고 발길을 돌린다. 시를 읽고 이렇게 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목놓아 울었다. 엄마이기 이전에 읽었지만, 그 참담함은 너무나 잔혹하게 슬프고 영롱해서 백 원이 없는 엄마의 마음이 되었다. 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설로 썼다면, 수필이었다면, 과연 내가 그 아픔을, 그 꾹꾹 눌러 담은 정제된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구구절절 펼치지 않고, 눈물 짜지 않고, 담담함을 넘어선 그 표현방식을 시 말고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시라는 알을 깨고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시는 어렵다는 작은 두려움을 접어두고, 짧으니 다시 읽고  읽으면 된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내가 찾은 의미로 나를 위로하고, 위로할 말을 기억하고,  전할  있었으면 좋겠다. 쓰기를 멈추지 않겠지만,  고민하고  좋은 방법으로 나누기를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그렇다 하지 않을지라도, 시인 아닌 이들이 시를 읽어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없는 삶이 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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