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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Oct 05. 2022

<쓰고 싶은 욕망>

이제 소비를 멈추고,

  뭐라도 쓰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으면, 무언가 사는데 돈을 써야 했다. 카페를 가서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산다거나, 계절 탓을 하며 옷을 산다거나 하는 등의 소비 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졌다. 쓰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쓰지 않고 버려 두면, 잉여 인간이 된 것 같은 죄책감에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 종종 그런 얘기를 했다.

  ‘누가 쫓아와? 왜 그렇게 널 못 살게 굴어?’

  한 두번 들었을 때는, ‘얘네는 내 상황도 모르면서 섣불리 판단하네’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대체 누가 쫓아 오길래 나는 날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쓰고, 부모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과 시간도 나눠 쓰다 못해 꾸어  쓰는 느낌이었다.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것은 목표만 있을 뿐, 휴식은 없는 컨베이버 벨트 같은 삶이었다. 그때의 나는 완성된 제품이 되어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는 부품 같은 삶을 살았다. 조각 나 있고, 완제품으로 달려갈 뿐, 이유나 의지 따위는 없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일은 절대 아니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을 같이 살았던 많은 친구들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나는 유독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이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내 몸을 무언가에 맡긴 채, 흘러가도록 두지 않고, 벨트 위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돌연 미국으로 갔다. 친구들은 내가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철부지처럼 행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절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한국에 있다 가는 혹시 죽지 않을까 싶어 나를 보냈었다는 말을 했다. 아무튼 그 시절의 나는 한국 안에 소도시, 그 소도시 안에 작은 학교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완제품이 되기 전에 도망치지 않으면, 나의 영혼은 영원히 죽어버린 채로 살아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시절 사회문화 시간에 보았던, ‘모던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의 빙의된 것만 같았고, 공장으로 미싱을 돌리러 가던 소녀들처럼 나는 나를 가둔 적 없던 사회와 가정에 나를 가둔 채, 사회에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나 자신을 태워 썼다. 착한 눈을 하고 사람을 대했지만, 증오의 눈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죽고 싶다 가도, 학교에 가면 마치 독립투사처럼 불의를 못 참고 부당함에 맞섰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나를 태워 쓰고 나면, 쉴 곳 없는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채로 오래도록 떠돌았다. 고등학교 내내 글도 쓰지 않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시쓰기도 몇 년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쫓기듯 떠난 유학길에서 나는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쓰고, 딱 한 장의 글을 쓰고 돌아왔다. 졸업 연사로 남겼던 한 장의 스피치는 절반 이상이 농담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를 울게 했고, 나는 5년 이상의 돈과 시간을 쓰고 서야 하고자 하는 말을, 삶과 부당함, 인생과 가치를 글로 쓰는 것의 의미를 돌려받았다.


  태생부터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말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고, 시간도 돈도 말하는 데 많이 썼다. 하지만 내가 삐뚫어질 때마다 말이 많아지고, 그러다 넘어질 때마다 말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안 이후로 말은 시간이나 돈만큼이나 휘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는 것은 쓰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이나 사진, 글과 같은 것은 오래도록 남아 사라지지 않고, 나를 살게 했지만, 그것은 쓰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읽고, 생각을 읽고, 숨은 의미를 읽고, 또 글을 읽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결코 기분 좋게 써지는 법이 없었다. 기분 좋게 써지는 것들은 대부분 한시적이었고, 오랜 노력 끝에 써야하는 것들은 결코 쉽게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최근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라는 책을 선물처럼 만났다. 돈을 쓰러 간 서점에서 책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옮겨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순식간에 ‘쓰고 싶은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간과 돈을 쓰면서 만족하는 행위의 부끄러움이 이제 제 몫을 하며, 글을 쓸 준비를 끝 맞추어 주었다. 나는 그동안 휴식을 샀던 것이다. 무심코 끌리는 대로 사고, 읽고, 마시고, 사랑하면서 끝내 쓸 준비를 했던 것이다.


  올 해의 절반이 갔다. 봄과 여름의 햇살이 가고, 다 써버리고 남은 떨어지는 계절이 남았다. 그러나 그 따뜻했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나는 잘 익었다. 주변의 시선과 친구들도 고루 익어, 쭉정이는 가고 열매만 남았다. 살찌는 계절이다. 마음이 편해서 살이 찌는 거라면, 나는 정말로 마음이 편한 것이 틀림 없다. 책 때문이었는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많이 생각이 난다. 한 번도 말을 함부로 쓴 적 없는 분들이었고, 그 단촐한 말들을 아낌없이 내게 쓰시던 분들이었다. 이제라도 작고 짧게 쓰는 문장들의 힘이 기억나서 다행이다. 이제 그만 소비하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쓰고 싶은 욕망을 불태워 봐야지. 바닥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을 말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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