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슬픔을 차 버릴 거다

by 김소영

슬픔이 발에 툭툭 차일 때가 있다. 조개껍질이 섞인 모래알을 밟고 서있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만 같아 더 걷지를 못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슬픔을 발견하고, 다시 나를 툭툭 차거나, 쟤 또 저런다 싶은 눈을 하면, 나는 이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 마냥 뒤집어져 울기를 반복한다. 혼자 일어설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벌러덩 있다 보면 마음에 가뭄이 와 말라죽게 된다. 이유 없는 슬픔은 없다 했는데, 나는 때때로 이유 없이 슬퍼서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했다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서 무언가 일이 잘못되거나, 혹은 그럴 만한 추임새가 보이면 일단 먼저 미안하다, 죄송하다 하고 보는 나였다. 그 생각의 끝은 ‘사과나무를 심다’라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는데, 종말이 오기 전에 못다 한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부터도 ‘뭐 이렇게 까지 심각해’라고 생각하지만, 살면서 미안했던 이들과(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이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글 쓰는 사람 치고, 불우한 어린 시절 혹은 상처 없는 사람 없다지만, 짧은 삶을 나름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같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만큼 극명하게 감사했다가 원망했었다. 또 땅을 치다가 하늘을 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해봐야 관심받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일 테니, 접어 두고 쓰면 그만이다.


몇 달을 애쓰며 쓰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생각만 하고 있는 소설이 있는데, 그걸 버리지를 못해 다른 글도 발이 묶여있다.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못 쓰는 이유를 백 만개쯤 만들어 내어 갖다 붙이고 있으니, 마음에 가뭄이 든 것이 틀림없다. 결국 그 글을 쓰려면, 버려야 할 것들을 전부 쓸어 담아 글로 버려야 함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과잉이 되지 않기 위해 매번 검열을 일삼으면서 정작 그것이 문제임을 이제야 알았다. 얼마 전, 몇 년을 들고 다니던 가방을 정리하려고 물건을 꺼내고, 가방을 털었는데, 과자 부스러기에 무언가 눌어붙은 동전 따위가 털어도 털어도 계속 나왔다. 결국 가방을 버렸다. 가방은 싼 것이었으니 다행이지만, 내 마음은 싼 것이 아니라 통으로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탈탈 털어도 계속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마음은 결국 빈 종이로 긁어내는 수밖에 없다. 다 털고 새 삶 시작한다기보다는, 새 글을 써야 한다. 삶을 버텨내는 이야기 말고, 삶을 사는 이야기로 성장해야 한다. 딱 고 정도에 머물러 있는 글과 마음이 더는 때 묻지 않도록 ‘슬픔이여 안녕’ 해야 한다. 물론,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슬픔은 또다시 던져가며 희망을 노래해야겠지만 말이다.


언제부턴가 삶이 팍팍해지는 순간들에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삶에서 눈을 돌리고,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슬프거나 혹은 아름답거나 혹은 이상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울고, 웃었다. 큰 위로였다. 덮어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 거라 걱정도 되었지만, 자고 일어나면 한결 괜찮아지는 것처럼, 책 한 권 읽고, 드라마 한 편 보고 나면 한결 좋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슬픔 들로 점철된 이야기 말고, 유쾌하고 때때로 멋지고, 또 그래서 살아 볼만한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 웃는 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제 한발 뗀, 어린애가 꿈도 야무지지만, 뭉친 눈을 던지면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누군가 맞아서 아픈 눈 뭉치 말고, 펄펄 내리는 눈송이로.


글 쓰는 포부라 하면 웃기지만, 다만 새로운 사랑을 맞는 마음으로 슬픔을 차 버릴 거다. 헌 마음과 멋지게 이별하고, 세상 끝까지 내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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