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를 읽지?
시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짧게 썼지만, 마음은 길었다. 내가 오래도록 시를 사랑해 온 이유와 사라져 가는 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했다(사실 시가 그 아름다움을 잃어 간다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시가 점점 원시와는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을 담아 글을 쓰고도 마음이 한 우물만큼 남아서 퍼다 올리다 보니 다시 시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좀 더 대중에게(나의 시를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께) 더 다가가기 위해서 시를 담는 그릇에 대해 더욱 고민했다. 시는 전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인데, 나는 때로는 투박한 모습 그대로 양동이에 담았고, 때론 반짝이는 유리잔에 담고 싶었다. 얼큰하게 취하고 싶은 날에는 와인 잔에 담았고, 때론 국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었다 반짝였다 하는 시를 많은 이들이 사랑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왜 시가 사랑받기를 바랄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의 존립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태초부터 시가 있었지만, 그 끝에는 시가 없었다.’라는 슬픈 이야기를 나는 듣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도파민이 생성되고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에 눈이 먼다. 그리고 이는 상대를 사랑하는 노래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외길이라거나, 상대가 태양이라거나, 혹은 내 마음이 불타오른다는 식의 사랑의 표현들은 때때로 음악이 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이는 보다 시의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거짓말로 보지 않고, 사랑에 눈먼 이의 노래로 본다. 이는 대체로 아름답고, 슬프기 그지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사랑할 것이기에, 그 끝에 시가 없다면, 우리 모두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체적으로 글로부터 받는 위로들은 저자가 우리에게 하려는 직접적인 말이기보다는 작가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사람, 동물, 사물,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태도와, 글을 통해 표현된 간접적인 사랑 고백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설사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랑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사랑을 노래할 것이고, 이는 시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끝내 남을 그 사랑 노래가 사랑받기를 바라고, 오늘도 멋지게 담아낼 그릇을 찾느라 고민한다.
그럼 누가 시를 읽지? 브런치를 하면서 든 가장 기분 좋은 결론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시를 찾는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시를 찾고, 탐닉한다. 이는 시가 순수 문학이거나 예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물론, 어렵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시가 말하는 대상이 우리가 겪었거나 겪을 삶의 일부이고, 각자 전혀 다른 눈으로 그 대상, 혹은 장면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나 에세이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뚜렷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시는 참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내가 알아듣기 나름이다. 시인이 ‘내가 한 말은 그게 아닌데?’라고 한다 할지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짧지만, 어려운 그 글을 부지런히 읽어 나간 순간, 그 시는 이미 나의 노래가 된다. 노래가 부르는 이의 것이 되는 순간처럼, 시도 그렇게 온전히 부르는 이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시는 다시 예술이 된다. 예술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기 어렵지만, 시로 한발 나아가면, 시는 당신에게 두발 더 와주리라 믿는다. 그것은 당신의 삶이 힘겨울 때,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며, 시가 남긴 위로가 당신의 다친 마음을 토닥여 줄 것이다. 시는 그렇게 우리가 삶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해 주고, 예술과 현실을 넘나드는 철학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때때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들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때때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아, 직장과 가정, 삶의 태도와 같은 것들을 전부 바꾸어 놓는다. 이는 시간적인 관념에서 보면 삶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삶의 방향을 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시는 아주 자주 우리가 살면서 놓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는 자주 철학적 질문들을 던지며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오늘 아이들과 읽은 ‘Color Monster’이란 그림책에서 보면, 나의 좋고 싫은 감정들이 다 섞여 있으면, 그것은 그저 ‘messy 지저분한’ 상태일 뿐이고, 그 감정들을 전부 다 나누어 각자의 자리에 담으면, 결국 사랑이 남는다고 말한다. 헤집어진 마음은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지만, 보기 좋게 담긴 마음은 하나하나 전부 소중하다. 시는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남기고, 결국 사랑이었음을 속삭인다. 흐릿한 마음 밭에서 모든 마음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결국 우리의 방향은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는 사랑처럼이나 어렵고, 그래서 더 값지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동사다’ - 철학자 존 듀이
흐린 마음이 나 스스로도 잘 읽히지 않던 때에 읽었던 글 중에 기억에 남았던 말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담아 쓴 시들은 나조차도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워, 우중충한 마음을 더 탓하게 되었었다. 그러다 다른 이의 시를 읽었는데, 바닥을 나뒹굴던 마음이 바닥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복잡한 마음들도 나름의 색을 가지고 제자리를 찾고 있었구나 싶었다. 결국 바닥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그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형용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갇히지 않은 새가 아름답듯이 갇히지 않은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시를 쓰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시를 읽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시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계속 시를 읽어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범생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어려운 시가 재밌고, 그렇게 정석으로 사랑하고 싶다. 글로 배운 사랑이 때론 허당(?)스러울지라도 답 없는 사랑에 대한 답지 임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시로 사랑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