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을 시작하며
글이 좀처럼 써지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서툴고 엉성한 문장들로 부끄러워진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값어치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혼자 떠들어 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줄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날이 샜다. 그러던 어느 날, 문장 하나가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눈을 떠보니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는 문장이었다. 이전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진 이의 말은 아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스러운지. 그렇게나 돌아볼 것이 많은 과거인지. 나는 늘 뒤를 자주 돌아본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했는데, 나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나무의 나약하고 어리석었던 시절을 본다. 시절의 나는 참 혼자 잘나서 엄마에게 모진 말도 많이 하고, 친구에게 상처 주고, 사랑을 잃고 헤매는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시를 쓸 때에도 그렇게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글을 주야장천 써 내려가고 있는 거 같다. 이런 나의 무의식의 반영인 것인지, 다시 태어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말을 반복한다. 다시 태어나면,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면 미안했던 이들에게 사과하고, 제대로(?)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 인가? 나는 아직 나와 조금 덜 친한 주인공에게 자꾸 말을 건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찾아가고 싶은 이들의 얼굴.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의 얼굴. 그들은 나의 마음의 조각들을 가져간 이들이다. 그들을 만나, 그때 왜 그랬는지 묻기보다는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이유들로 헤어져야만 했던 우리를 다시 한 프레 임안에 넣어보고 싶다. 하지만 새 삶에서는 나의 마음을 주지 않고, 절대 나눠주어 상처 주지도 받지도 않고, 마음을 지키고 싶다. 다시 사는 삶은 불행하고 싶지 않기에.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내 마음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나를 소설에 그려내고 싶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결국 사는 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고 또 주고 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새 삶을 얻어 상처 받지 않는 삶을 택했지만, 결국 그런 삶은 없고, 설사 있다 할지라도 불행하기 짝이 없다. 결국 이전의 삶이나 새 삶이나 마찬가지로 나의 행복은 내가 결정하고, 제대로 사랑하며 사는 것도 나의 선택이라는 얘기다.
결국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또다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 그것이 나의 이야기의 맥락인 것이다. 모든 수식어와 이야기와 감정을 덜어내고 나면, 결국 남은 것은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세상 에 남을 유일한 색인, 핑크로 나는 글을 그려나갈 것이다. 비록 그것이 엉성하고, 산으로 가는 이야기일지라도. 결국엔 내 글의 맥락도, 삶의 맥락도 전부 사랑으로 귀결되기에. 그것이 나무 한 그루이든 숲이든 간에 같은 색으로 그려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