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날씨, 흐림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사두기만 한 채 수개월이 지났다. 리뷰를 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제목에서 어떠한 큰 힌트를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읽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쌓아 두었던 책 더미 위에 아이가 물을 엎지르고 나서야 고이 아껴둔 책이 젖었다며 울적해했다. 결국 책 한쪽이 조금 젖고 나서야 미안한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늘 글의 앞머리에서부터 집중하기가 어렵다. 머릿속에 배경이 온전히 그려질 때까지 나도 모르게 한참을 같은 구절을 읽게 된다. 시간을 들여 주인공의 마음의 고향인 시골 마을에 잘 안착하여 바닷바람을 맡고 서기까지, 족히 한 주는 걸렸다. 그런데 채 몇 장을 읽지 못하고, 마음을 꺼내어 볕에 널어 두고 싶다는 구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지금 나의 마음 상태가 이런 것일까. 한동안 마음 없이 살아도 좋으니, 젖어 축축한 상태의 마음 따위는 들고 다니지 않고 싶은 마음. 이러한 마음은 사는데 영 불필요하기에 햇볕에 쫙쫙 펴 말리고 싶은 마음. 오랜 습관 중에 하나가, 마음이 힘들면 화장실 바닥에 드러누울 때까지, 땀 흘리며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인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나의 고질적인 습관이 이런 마음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크게 효과가 없는 것은 드라마틱하게 슬펐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평온하게 우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좋은 것도, 아주 나쁜 것도 없고, 나의 불행이 가끔은 너무나 하찮고, 그런 내가 한심하지만, 때론 너무나 크고 대단한 것이어서, 감당하기 힘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거나, 대단한 감상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우울한 기질을 타고 낫다고 인정하는 수준 정도랄까. 애석하게도 그 기질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고, 예술적인 능력 또한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 틀림이 없어, 크게 나를 부정하거나 물음표를 달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란 것이 그 우울과 조금 친해져 보는 것인데, 이 놈이 참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도 몇 번 씩이나 과거를 파헤치며 우울의 늪을 만드는데, 이렇게 글에 적어 내려갈 수 있는 날은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잘 지내기 위해서 오늘 쓴 방법은 머리를 자르는 것이었다. 대담하게 싹둑. 아주 가끔만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잘라낼 수 있는 것 중에 이만한 게없다. 그동안 애써 기르며, 애지중지 했던 머리카락을 한 순간에 반 이상 잘라내면, 남는 것은 시원함. 그뿐이다. 이렇듯 마음과 잘 지내려면, 자주 덜어내고, 버리고, 잘라내야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 자체도 마음을 담아서 옮기는 과정 중 하나이다. 얼마나 지나야 이 고단하고, 가치 없게 느껴지는 행위 자체에 대한 만족이 아닌, 스토리가 있는 한 이야기의 주인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거짓 없이 뱉은 이 많고 많은 말들이 한 번 읽히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야기로 남아 다시 읽힐 수 있을까. 셀 수 없는 별을 계속 세는 것처럼, 나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도 누군가로부터 헤아려질 수 있을까.
결국 오늘은 책 한 구절도 우울한 마음 때문에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못난 내가 언제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푸념하는 글뿐이지만, 내일은 이 많은 푸념들이 모여 나의 마음과 친해지고, 당신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글로 채워갈 수 있기를. 그저 한 쪽짜리 불평이 아닌, 긴 삶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의 우울이 나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우울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도구가 되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위안이 되는 것처럼, 우울보다 큰 우울이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이 의미 없는 행위가 의미가 있었다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오늘의 우울에 이름을 달아본다.